살면서 잊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5월의 어느 토요일 저는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고 잠결에 아침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신 아버지께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을 들었습니다.

'누가 자살했데...'

그런데 왜 저는 반사적으로 그게 당신이라는 걸 직감 했을까요.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나서 안방에 TV를 5분 정도 멍하니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제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습니다.

그렇게 1시간 정도 이런 저런 기사들을 살펴보다가 다시 침대에 누웠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안 났습니다. 그냥 머리가 아프고 다시 자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으니까요.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그렇게 이런 저런 기사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정말 아무런 생각도 안 들고 그냥 멍했을뿐인데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흐르더군요.

처음에는 그냥 한 두 방울이겠거니 손으로 훔치다가 그렇게 펑펑 울었네요.

그때서야 실감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차피 내가 당신과 함께 살 것도 아니고 그저 TV에서 인터넷을 통해서 소식을 들을 뿐인 당신이기에

실감하지 않으면 되는데 그게 참 안 되더군요.

...

기억 나세요?

2001년 자치경영연구소에서 노사모 총회가 열렸었죠.

당신은 해양수산부 장관이었고 어렵게 시간을 내서 지역대표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때였습니다.

저는 그저 간단한 사무보조나 하는 입장에서 한쪽 구석에 앉아있었구요.

회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러면 이만 마칠까 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저는 손을 번쩍 들었고

'저 질문있습니다.'

'그래요. 무슨 질문이 있습니까'

'실내에서 지금 담배를 피고 계신데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니십니까?

노사모 회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척이나 진지했는데 주변에서는 폭소가 터지고

당신은 겸연적게 웃으면서

'제가 실은 담배 필때 주위에 실례한다고 양해도 구하고 그랬습니다...'

21살 어린 학생이 그 진지한 시간에 어이없는 질문을 했는데도

당신은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 말끝을 흐리셨었죠.

그저 다 같이 웃고 어른에게 실례했다고 저를 탓하는 분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며칠 뒤에는 후원회장 이기명 씨가 찾아와서

제 덕분에 노짱이 담배를 끊었다면서 안 그래도 나도 담배 끊으라고 자꾸 이야기 하는데 안 들었다고

정말 잘했다고 하시면서 점심 맛있는 거 먹으러가자고 하시더군요.

...

경호원에게 당신이 담배 한 대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때 왜 전 타임머신을 타고 간 것처럼 그 때 생각이 선명하게 났을까요.

당신이 임기 후반기에 접어들었을때 함께 했던 분들과 술을 마시면서

언제 당신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전 그 중에서 가장 느렸던 거 같습니다.

술 한 잔에 당신에 왜 실패할 수 없었던가 떠들어댔던 기억이 왜 이렇게 선명하게 날까요.

당신의 600만 달러 수수의혹과 사과문을 보았을때 저는 신문과 뉴스를 끊었습니다.

도저히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터무니 없는 핑계지만 저도 5년 동안 정말로 힘들었거든요.

퇴임 후

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알량한 감상주의에 알량한 책임의식에

이제는 다 끝났거니 이제는 당신의 잘못을 내 잘못인거 마냥 아파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했었는데...

저는 다시 그 질척거리는 진흙탕 속에 들어갈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러다가 당신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얼마나 좋은 대통령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뿌옇게되버린 당신을 반짝 반짝 빛나는 왁스인형처럼 기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언제나 진심이었다는 건 이제 조금 알았습니다.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당신이 뜨거운 사람이었다는 것도 이제 조금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퍼부었던 비판이 실은 고고하고 싶어하던 자위의식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당신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더라도 내가 했던 비판이 당신의 진심과 열정에 응답할만한 뜨거운 것이었다면

지금 나를 짓누르는 당신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은 덜 수 있었을텐데...

죄책감 때문일까요. 매일 밤 잠이 들기 전에 부엉이 바위 위에 고독하게 서 있는 당신이 자꾸만 눈에 밟히네요.

미안해요.

이십대의 나보다도 더 꿈많고 밝은 미래를 기대하던 당신을 그토록 짓누르던 고통에 눈 한 번 돌리지 못해서 미안해요.

당신의 뜨거운 진심에 단 한 번도 내가 열정으로 대답하지 못해 미안해요.

늦었지만 아직은 너무나도 설익은 신 사과이지만... 지금 제가 당신에게 내놓을 수 있는게 이거밖에 없네요.

그래도 조금만 더 기회를 주실 수 있을까요?

언젠가 내 안에 잘 익은 사과가 열린다면 당신에게 제일 먼저 달려가서 전해드릴께요.

이제 당신을 그렇게 떠나보내던 토요일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민주주의가 자리잡는다 하더라도 당신의 이름은 제 안에서 참 많이 아프게 기억될 거예요...

- 진심으로 살아왔지만 참 많은 상처를 품었던 당신에게 늦었지만 추모대신 풋사과를 올리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