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시다시피 전후 일본은 전쟁책임에 대한 반성이나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에 대해 소극적입니다. 오히려 일부 극우세력에 의해서는 2차대전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적극적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패망직후 미국의 외압에 의해 만들어진 소위 '평화헌법'이라는 것이 어떻게 아직까지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최근 읽고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네이션과 미학>이라는 책에서 설득력있는 해명을 하는 구절이 있더군요..

"평화헌법이 유지되어 온 것은 좌익의 프로파간다 때문이라고 이야기되기도 하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가 군비포기 정채을 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공산당은 전후 일본이 아메리카에 식민지적으로 종속되어 있다고 간주하고, 민족독립의 군사적 투쟁을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말해, 전후 좌익은 부르주아 국가의 군대는 반대했지만 인민군은 긍정했다. 그것은 신좌익파 다수도 마찬가지였다. 총체적으로 전후 좌익은 제9조를 지켰다기보다는 그것을 이용하려고 했을 뿐이다. 선거에서 그것만 말해 놓고 나면 일정정도 보수파에 대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9조가 존속해온  것은 좌익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일본의 좌익 또한 제9조를 뒷받침하고 있는 '무언가'에 지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 <네이션과 미학>, 124쪽)

여기서 가라타니 고진이 그 "무언가"로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후기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내면화된 "초자아" 그리고 정언명령의 이행이라는 의무를 '자율/자유'로 보는 칸트의 윤리철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일본 국민 즉 일본의 "네이션"은 2차대전을 일으켰던 일본의 '공격충동'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서 내면화된 초자아의 영향을 받았고 또 그것이 네이션이라고 하는 공동체적 '문화'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일본국민이 '죄악감'을 갖는다면 그것은 아메리카의 책략 때문도 일본의 침략에 의해 희생된 아시아 국민이 비난하기 때문도 아니다. 물론 죄악감은 그와 같은 '바깥'없이는 있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안'으로부터 오는 것 없이는 지속(반복강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죄악감'은 이제는 공격성(가해)의 양이나 질에 의해 가감되거나 변상에 의해 해소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반성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초자아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문화'이지 병이 아니다"(같은 책, 127쪽)

이처럼 공격충동이 자신에게로 향하여 내면화된 초자아 혹은 윤리를 문화화한 결과가 평화헌법이 지금까지 유지된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이 가라타니의 설명입니다. 반대로 미국은 이러한 초자아가 실패한 사례라고 할수 있는데 베트남전쟁에 의해 형성된 공격충동에 대한 반성이 걸프전쟁 (혹은 최근의 이라크 전쟁)을 다시 벌임으로써 반복강박이라는 신경증적 '병'으로부터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