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사이코 코미디의 걸작 <애니홀>
우디 앨런 감독, <애니 홀>(Annie Hall, 1977, 미국)
이런 가정을 한번 해보자. 만약 당신이 영화사 사장인데 제법 알려진 코미디언이 시나리오를 하나 들고 왔다. 두꺼운 안경테 너머로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며 그 남자는 말한다. ‘소심한 뉴욕 남자의 연애 실패담입죠.’ 당신은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흠 이거 괜찮은데. 괜찮은 스크루볼 코미디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정작 읽어보니 이 시나리오 희한하다. 스토리는 시간 순서대로가 아니고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이며, 현재 인물이 과거를 방문한다. 게다가 주인공은 카메라를 보고 이야기를 하며, 그들의 심리 상태가 자막으로 나오고, 느닷없이 애니메이션, 화면 분할 등이 이루어진다. 그렇다. 한마디로 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시나리오다. 당신은 이 영화에 선뜻 제작비를 지불하겠는가? 이건 당신이 관객의 입장이래도 마찬가지다. 영화표 사기가 망설여 질 것이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영화는 대히트를 했고, 아카데미 주요 네 개 부문을 낚아챘단다. 눈치 챘겠지만 난 지금 <애니 홀>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는 거다.
영화가 시작되면 스피노자를 닮은 한 남자가 카메라를 쳐다보고 느닷없이 말을 건다. 남자의 이름은 앨비 싱어. 뉴욕의 코미디언이다. 보기에도 소심해 보이는 이 남자, 아니나 다를까 여자 친구인 애니 홀과 헤어졌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이때부터 관객은 정신분석학자가 되어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거기에는 삶과 인간관계에 대한 부조리한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앨비는 뉴욕이라는 고립된 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성장하지 않는 아이와 같다. 이런 앨비를 애니는 사랑하지만 가수로 ‘성장’하기 위해 LA로 떠난다. 두 사람은 싱어(Singer)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듀엣으로 노래를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파격적인 내러티브와 심각한 주제를 재밌게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정신분석과 코미디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우디 알렌의 탁월한 전략에 있다. 무거운 주제를 코미디로 가볍게 하고, 내러티브상의 결함을 정신분석이라는 형식으로 허용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관객에게 말 걸기를 평론가들이 브레히트의 소격효과 운운하면서 흔히 이야기하지만, 정작 관객에게는 스탠드 업 코미디와 토크 쇼의 익숙한 경험으로 수용되는 것도 우디 알렌의 이중 전략으로 보인다.
영화가 성공한데에는 이 영화가 개봉된 1977년이라는 시점과도 관련이 있다. 그 시기 미국은 60년대의 자유롭고 비판적인 공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영화 속에 그려지고 있듯이 사람들은 섹스와 정신 분석에 관심이 많았으며, 마약과 신흥종교에 열광했고, 젠 척하기를 좋아하는 뉴요커들이 많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두 개의 블록버스터인 <스타워즈>, <미지와의 조우>의 사정권을 운 좋게 벗어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