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내미가 방학을 맞이하여 외갓집에 갔었다. 방학때만 되면 딸아이를 내려보내라고 어른들이 성화다.

외갓집에 가봐야 또래의 친구도 없고 있는거라곤 할아버지, 할머니, 개 한마리.....딸아이가 한 살 더
나이를 먹을수록 외갓집이나 친가에 가서 저 혼자 보내기를 싫어라한다.

하지만 방학이 되면 맞벌이 하는 부부의 사정상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지난주에 대전 외갓집에 보냈던 딸내미를 어제 제 엄마가 데리고 올라왔다.

아빠가 집에서 빈둥빈둥 백수생활을 하고 있는데 굳이 딸아이를 멀리 보내놓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나보다.


나는 사실 내심 딸아이가 계속 외갓집에 있길 바랬다.


이 녀석 챙겨 먹이기도 귀찮고, 이리저리 놀러 다니려는 내 계획에도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장 귀찮은것은 딸아이가 있으면 내 몸가짐을 똑바로 하려는 무의식적 자각 때문이다.


어제까진 씻지도 않고, 면도도 안하고 파자마 차림으로 집에서 노숙자 모드로 뒹굴었지만, 딸 아이가 오는 순간
어지간하면 딸아이보다 먼저 일어나서 씻고, 면도도 하고, 딸아이 보기 민망하지 않은 차림으로 지내려고 한다.


딸아이에게 허술하고 보잘것 없는 아빠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딸은 아빠를 통해서 남자를 배운다.


게다가 마눌이 특명을 내렸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딸은 피아노 학원도 다니고 뭣도 다니고 이런저런 특별활동을 하러 다닌다.


그런데, 점심 이전에 딸아이를 데리고 하루 한시간씩 영어를 가르치랜다.



초등학생이 배울만한 영어......못 가르칠것도 없다. 그렇지만 딸아이의 입장에서 그걸 굳이 배워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사람이란 어차피 필요한 때가 되면 배우는 것...선행학습처럼 의미없는 일도 없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거절을 못한것이 엄마가 하라고 시켰다기 보다는 딸이 아빠랑 공부하고 싶다고 했나 보다.


보통은 가족에게 배우기 싫어하고, 자기 자식 가르치다 보면 열을 받는다고 하지만.....예전에도
딸 아이의 숙제를 도와주다 보면 딸은 아빠에게 배우는걸 참 좋아했었다.


아빠가 학원 선생님조다 조근조근 재미있게 설명해준다고 한다.



어쨌든 책을 펴들고 40~50분정도 기초 영어를 가르쳤다.



사실, 딸이 내가 배운걸 앞으로도 기억할런지......지금 가르치는게 딸아이의 공부에 자양분이 될지는 상관없다.



난, 그냥 딸아이의 기억에 아빠랑 방학동안 같이 책상머리에서 공부를 했었다는 추억 하나만 심어주면 좋겠다.


아빠가 사다준 좋은 물건, 아빠와 갔었던 좋은 곳......이런것 보다는 책상머리에서 아빠랑 조근조근 대화를 나눴던 어느 여름방학...



추억을 공유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