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밤잠을 설치다 이른 시각에 잠을 깼다. 더듬더듬 책상 위에 놓인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어 물었다. 치이익 담배 타들어가는 소리에 스르륵 눈곱이 낀 눈을 떴다. 담배를 문 채로 창에 걸터앉아 바깥세상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가로등마저 포옥 잠이 든 어슴새벽의 다섯 시, 그 고즈넉한 풍경에 흠뻑 취하기 시작했다. 몇 분이나 넋을 놓은 채 새벽 향기를 느꼈던가? 시나브로 옅어지는 코발트블루 빛 사이로 곱디고운 동이 터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깊은 밤을 환송하는 정갈한 새벽의 의례는 마무리 되었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햇살을 맞으며 하루를 열어보지만 금세 밤이 그리워졌다.

  밤에 대한 나의 각별한 애정은 강릉에서 머무를 때부터였다. 관동팔경의 수묵화는 사시사철 고된 삶을 달래고자 찾은 인파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시간, 스스로를 화(化)한 망루 위의 수많은 푸른 등신불들이 하나 둘씩 동해안을 지키기 이한 빈틈없는 경계작전에 투입된다. 나도 그 무리 속에서 차디 찬 동해의 밤을 지키던 한때였다. 해안에서의 작전은 고되다. 휴식을 취하러 온 이들의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져 갈 무렵, 우리의 모래시계는 비로소 시작한다. 낮과 밤이 뒤바뀐 채로 무거워진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소총을 들고 철책으로 나아간다.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언제 나를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매서운 파도와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로 밤새 긴장을 늦추지 않는 일이란 실로 고행이다. 푸른 수의를 입지 않았다면 누구도 기피할 일이다. 허나 모두가 같은 시간 같은 곳을 바라볼 수는 없다. 스스로를 달래며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자리로 나아가는 이들을 지켜보았다. 밤이 찾아왔다.

  해안에서의 생활이 수일이 지나 외롭고 두려운 밤이 익숙해질 무렵, 나는 자연스레 밤과 벗이 되었다. 그날도 터벅터벅 순찰로를 따라 걷다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은 깊었고, 별은 밝았고, 달은 찼고, 소총과 전투화는 가벼웠다. 그때 보았던 별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달빛도 밤의 차가운 공기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는 오롯이 혼자였으나 외롭다는 생각보다 충만한 기분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과 그리운 추억이 담긴 달, 밤길의 나침반이 되어 날 이끌어준 별, 그리고 조국의 관문에 우뚝 선 이름 모를 수문장들. 이 모두를 품에 안은 밤은 기꺼이 나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밤빛에 물들었다.

  사람들은 대개 낮을 좋아한다. 해를 좇아 밝음에 이끌리며, 드러나 보이길 바란다. 해는 모든 힘의 원천으로 세상을 움직이며 밝게 만든다. 반면 밤은 무채색의 풍경 속으로 모든 걸 숨겨버린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은 쉽게 잊곤 한다. 어둠이 있어야 비로소 밝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하루 종일 낮이라면 우리는 그 뜨거운 열기에 금세 지쳐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밤이 존재한다, 보다 밝은 낮을 누리기 위해서. 밤빛을 들여다 보았는가? 촘촘히 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별빛은 아주 먼 어느 과거의 순간에 생이 멸(滅)하는 찰나에 터뜨리는 슬픔이 담겨 있다. 어둠을 환히 비추는 포근한 달의 뒤에는 어떠한 빛도 스며들 수 없는 죽음의 흑(黑)이 남겨져 있다. 이런 역설과 모순이 공존하는 밤은 다시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낮 동안 얻은 슬픔과 고통을 잊고 편안히 쉬어갈 수 있는 안락한 꿈결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처럼 만물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내일의 생을 준비할 때, 조국의 뜨거운 심장들 또한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묵묵히 누군가의 밤을 지켜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긴 어둠 속에서 세상을 품는 밤의 일원이 되어 동해안을 지켰다.

  바쁘게 살다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놓치기 쉬운 것들이 많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사람 냄새는 어디론가 숨어버린 듯 하다. 밤의 고마움을 잊어버렸을까?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부쩍 밤이 그립다. 다가서기 어려운 낮의 뜨거움보다 상처와 슬픔을 추스르는 밤의 고요함이고 싶다. 모두가 낮의 찬란함을 좇더라도 나는 그들을 지키는 밤이 되련다. 뜨거운 태양 아래 밤빛이 땀으로 흘러내려 다시 밤이 그리워질 날에는 밤의 매력을 일깨워준 동해안에서의 별과 달과 밤바다가 떠오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소명을 지켜낸 밤과 같은 그들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