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포즈? 청혼?

결혼해서 10년 넘게 살고 있고, 처음 만나서 연애하던 기간까지 계산하면 15년째 알고

지냈지만, 난 사실 이걸 제대로 하질 못했다. 그냥 어영부영 뭉갰다고나 할까?


언젠가 밝혔지만 나와 마눌은 대학교 4학년때 졸업여행에서 만났다. 같은 4학년 졸업반이었지만,

복학생이었던 나는 26살, 마눌은 22살(흐미!!)의 어느 봄날이었다.


어영부영 영화보자고 하고, 어영부영 다음 약속을 잡고.....

"나랑 사귈래" 또는 "이제부터 우리 사귀는거다" 따위의 말은 한 적이 없었다.


그냥 학교 끝나고나서 맨날 만나서 먹고, 마시고, 놀고...졸업하고 취직해서도 거의 매일 만나서

먹고, 마시고, 놀고..... 그냥 만나는게 사귀는 것이지, 무슨 프로포즈를 한다는 것인지.....


2년반을 넘게 만나고 연애를 하면서도 한 번도 헤어지자거나 그만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맨 처음 연애초기에 나는 마눌에게 이런 말을 했던것 같다.


"혹시 나와 헤어지거나 그만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한번 더 생각해보고.....두번 생각해 보고서도

헤어지고 싶으면 말해라. 그럼 절대 이유를 묻지도 않고, 붙잡지도 않고 내가 돌아서 갈게"


나도 그렇고, 마눌도 그렇고 장난으로라도 이별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졸업하기전부터 나는 모회사의 신입사원, 마눌은 본교 대학병원의 신참 간호사로 사회에 발을 내 딛었는데

졸업하고 취직하고 나니까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내 여친을 보고 싶다고 해서 시내 모처의

식당에 예약을 해 놓고서 여친을 불렀다.


약속된 레스토랑에 가봤더니 어머니에, 형수 두명에, 초등학교 다니는 조카 색희들 세명까지......

쪽팔리게도 바글바글 나와서 우리 마눌을 가운데 앉혀 놓고 청문회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아, 극성스런 집구석......


얼마 지나고보니 이번엔 반대로 저쪽 집안에서 나를 보고 싶어한다고 하신다. 어느 토요일 오후

마눌을 따라서 졸레졸레 강남의 어느 한식당에 갔더니 왠 아줌마들이 다섯명이 모여있었다.

이 집구석도 만만치 않았다. 장모님 형제가 2남 6녀인 집안인데, 집안에 있는 이모들 중에서 미쿡 사는

큰 이모 한분 빼놓고는 총출동 하셨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이 이모가 묻는 말에 대답하다 보면, 저 이모가 음식을 집어 내 입에 넣어주고...

밥을 한 3인분은 먹었나보다.

마눌이 4촌들중에서 젤 맏이는 아니었지만 워낙 일찍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되어서 집안의

관심이 지대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해 어느 가을날,

우리 어머니께서 갑자기 마눌의 부모님 전화번호를 묻더니 전화를 하신다. 이번주 토요일에

대전에 한 번 내려가신다고 약속을 잡으신다.  그리고 그 주 토요일이 되어 나보고 기차역으로

앞장서시란다. 어머니를 모시고 대전에 도착하여 약속한 식당에 가보니 장인어른이랑 장모님이

나와계신다.


카리스마 만빵인 우리 어머니의 말씀에 장인이랑 장모가 별다른 대꾸를 못하고 자꾸 말려드신다.



엄니 : "애들 서로 좋아하고, 직장 생활 하니 더 기다릴게 뭐 있습니까? 괜히 연애한다고 길바닥에 돈 뿌리고

           다니는 것보다 빨리 결혼시키는게 남는겁니다."

장모 : "그래도 우리 딸이 아직 어려서....."

엄니 : "어리기는요, 저도 그 나이에 시집 가서 애 낳았습니다"

장모 : "그래도 그건 옛날이야기고 요즘은......"

엄니 : "우리 아들이 맘에 안 드십니까?"

장모 : "그건 아니고......."



옆에서 장인 어른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아무소리도 못 하고 있고, 장모는 우리 엄니의 페이스에
 
제대로 말려들고 있었다.


엄니는 그 자리에서 식장이 잡히는대로 결혼을 시키는걸로 하자는 약속을 받아내고 서울로 오셨다.


엄니는 서울에 오시자마자 나에게 통장을 주면서 적당한 집을 구해 보란다. 그리고 빨리 학교 성당에 가서

식장을 예약하란다. 



황당해진 나는 아직 결혼생각이 없다고 말하다가 엄니와 형수들의 맹공을 받았다.

생각해보니 결혼을 일찍 한 집안내력상 내가 우리 형제중 결혼이 젤 늦었다.

"직장 있고, 애인 있는데 왜 결혼을 안 하느냐?" "무슨 꿍꿍이가 있느냐?" 난리가 아니었다.


이때가 27살의 늦가을쯤 일이었다.


곧 연말 다가오고 바빠지기도 했고, 집을 알아보고, 식장 알아보는 건 차일피일 미루고 개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28살이 되었다. 그리고, 마눌은 24살이 되었다.

새해가 되니까 엄니의 압력과 잔소리는 더욱 심해져서 할수없이 마눌이랑 둘이서 주말마다

이동네 저동네로 집을 보러 다녔다. 그래서 도봉산 자락의 방학동에 조그만 아파트를 계약했다.



이젠 식장을 알아보러 다녀야 했다. 천주교식으로 결혼하기로 이야기가 되어서 학교 성당에 가봤더니

봄철 결혼미사는 예약이 마무리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느즈막히 10월쯤으로 날짜를 정해두고

간 김에 피로연 장소도 예약하고 왔다.


성당에서 결혼하려니 신랑/신부 둘이서 성당에와서 무슨 교육을 받으랜다. 혜화동 성당에 갔더니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다. 그곳에 두번인가 가서 결혼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


그렇다 결혼식은 6개월도 더 남았는데, 집도 구하고, 식장도 잡고, 별거별거 다 해놓고......

그냥 드레스만 입으면 될 정도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어라???






생각해보니......








청혼이란걸 안 했다.

한번도 "결혼하자" 또는 "나랑 결혼해줄래" 또는 "우리 같이 살래"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청혼도 안 하고서  결혼해서 같이 살 집 구하러 다니고, 식장 예약하고 다닌 놈도 참 웃기지만,

그걸 쫄레쫄레 다 따라다닌 이 여자도 정말 웃긴다.



결혼을 앞둔 어느 여름날이던가?



신촌에 있는 어느 맥주집에서 둘이 술을 마시다가 화장실을 가는척 하며 밖에 나가서

그 앞에 있는 꽃집에서 꽃다발을 하나 사들고 들어 왔다. 마눌은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그전에도 심심치않게 꽃다발을 자주 사줬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 많은 맥주집에서 무릎을 꿇고 말했다.


"나랑 결혼해 줄래?"



마눌은 유쾌하게 깔깔 웃는다.


"식장까지 잡아 놓고서 이제와서 쌩-쑈를 하십니다"



나는 그래서 이렇게 못을 박았다.


"어쨌든 프로포즈 한거다. 나중에 이걸로 시비걸기 없기다. 알았지?"




지나고 보니, 이렇게라도 하고 넘겼으니 망정이지 안했으면 마눌에게 두고두고 갈굼당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