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한지 6개월 만이다.

정리할 짐이라고는 전자계산기와 스테플러, 그리고 등산용 컵 하나다.

종이컵 쓰지 않고 이 컵 하나로 물마시고, 차타먹고, 양치하고 다 했었다.

6개월이란 시간이 마치 선잠에 꾼 꿈처럼 느껴진다.

어떠한 열정과 치열함도 없고, 오직 기계적 충실함만 있는 가여운 영혼들을 본 듯한 께름칙한 꿈.

아니면 마치 낯선 시간대에 떨어져 정신과 육체가 제대로 접합하지 못하여 서로를 부등켜 안으려 애쓰는 듯한 꿈.

모든 시간대에서 원하지만 어떤 시간대에도 속하지 못하는 어정쩡함이 주는 고독.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하였다.

복직하고서부터 쫓아내기 위해 안달이었다. 1개월동안 인사팀 대기,리포트 내라는 것 외에 주어진 일은 없었다. 출입카드도 없어 마치 독방에 가둬놓은 죄수의 형상이다.  보험금 심사부서로 발령내고서도 보름간 아무일도 주지 않고 아무도 말걸지 않았다. 체력단련휴가를 내니까 왜 휴가를 갔냐고 난리다. 주어진 일도 없고 또 전자결재를 통해 휴가원을 제출하고 결재까지 승인이 나서 온 휴가인데 뭔소리냐고 하니, 하는 말이 그날부터 일을 주려고 했는데 휴가를 가고 없더란다. 그래서 그 다음날 휴가를 취소하고 회사를 나갔다. 그랬더니 아무런 오리엔테이션이나 교육도 없이 보험금 심사업무를 맡겨버린다.

어떤 상품을 파는지, 상품 약관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진료기록부는 어떻게 보는지, 흥국생명의 심사관행은 어떤지, 전산업무는 어떻게 처리하는지 아무런 교육없이 바로 심사를 보았다.

일이야 겁없이 하는 편인지라 못할 것도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황당했던 것은 업무 처리(특히 전산처리는 독학으로도 안되는 것이니 참으로 난감했다. 도대체 어느 키를 눌러야 되는 것인지, 매뉴얼 하나 없이...) 를 위해 물어봐도 대답을 안해주는 것이었다. 뭐 하나 물어보면 화들짝 놀라며, 오로지 차장한테만 물어보라고 넘겨버리니. 허 참.

처음엔 왜 이럴까 의아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으나,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지시가 내려간 듯 싶어 오히려 얼마나 난감할까라는 생각에 더이상의 접근을 포기하였다.

나중에 한 친구로부터 고백을 들었다. 죄송하다고, 지시가 내려왔다고. 일체 상대하지 말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감시하고 보고하라고 했다고. 왜 그래야 하냐고 대들려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한다고, 괘념치말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얼마나 오래 있을지 알 수 없는 회사여서, 아는 조합원이나 지인들에게 사내 메신저나 메일도 하지 않았다. 혹여라도 나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할지 모를 일이어서 내가 접근하지 않는 것이 편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모든 일을 접고 노동조합을 다시 세우는 일을 하겠다고 작정하였다면,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접촉을 시도하였을테나 그럴 계획은 세우지 않은터라 혹여 내가 회사를 그만두게 되더라도 불이익이 없도록 내쪽에서 배려하여야 했다.

다만 노동조합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 이미 노무관리노조(이런 표현이 적당하다면)라 어떤 기대도 없었기에 복직이후 전화 한통 하지 않고 감봉 6개월이라는 징계를 당하는데도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싶었다. 그러나 조합원으로 복귀시켜달라는 주문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시셋말로 생까고 나온 것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겁이 났을 터이지만, 그렇더라도 왜 조합원이 될 수 없는지 이유를 단 한마디라고 표현해야 하는데 아예 연락자체를 하지 않는다. 참 가여운 일이다.

회사에다 정리해고 동지들에 대해 일정한 양보를 하면 내가 회사를 그만둘 수도 있다는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현 경영진의 입장으로는 씨알도 안먹힌다는게다. 짧은 기간이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해 참으로 답한 심정이었다.

업무야 맨땅에 해딩하는 심정이었지만, 안가르쳐주면 내혼자 한다는 오기로 했던터라 시간이 지나니 점점 익숙해졌다. 진료기록부도 훨씬 쉽게 해독할 수 있게 되고(솔직히 일반인들의 눈에 의사들의 진료기록부는 무슨 암호문 같지 않은가!), 보험금 쉽게 타는 법에 대해서도 알만하게 되었다. 우습게도 업무를 참 잘한다는 소문까지 났다__;; 그러나 6개월 내내 혼자 점심 먹으러 가는 신세는 면하지 못하였다.

어쨌든 6개월만에 사표를 냈다. 제일 맘에 걸리고 안타까운 건 해고동지들이다. 해결책을 만들어내지 못한 책임감이 앞선다. 그리고 식구들에게도 참으로 미안하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생계문제의 절박함을 누를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만큼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이 크다. 더 큰 책임을 지기 위한 선택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해야 할 일이많다.

2009년은 이렇게 가고, 2010년이 온다

출처

http://blog.naver.com/htkim82/70076869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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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이야기 같지 않네요. 특히나 혼자서 점심 매일 먹으러가는 심정...

잘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