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부터 단속적(斷續的)이지만 신경을 써야 했던 일감이 하나 있었는데 오늘부로 끝을 냈습니다. 

업무는 그런 대로 잘 소화했지만 생각보다 마음대로 되지 않은일로 씁쓸한 기분에 늦잠을 자버렸고. 아니. 원래 늦게 일어나는 날인가. 씨익.

잠결에 잘못들었는지 비가 창문을 때리는 달콤한 소리가 들려오더군요. 창문을 열어봤더니 비 대신 얌전히 내리는 눈.  

착각이라 할지라도 원래 그런 소릴 들으며 잠에서 깨는 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집안이 더 아늑해지는 분위기에 

단잠이 고파 도로 자리에 누웠습니다.

잠이 들자마자 곧 꿈속 눈내리는 광경이 펼쳐졌지요.

어느 대학교의 후문(後門)인지 옛 궁전의 뒤뜰인지 모를 곳을 걷는데.  눈이 하늘 가득 쏟아지고 사방은 하얗더군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러자 어렸을 적에 곧잘 갔던 시골 친척집 비슷한 집이 보이고. 눈은 여전히 내렸습니다. 이처럼 풍성한 눈은 실제로 본 적이 없었던 것 처럼. 

그 집에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으면서 사람이나 물건의 옆모습을 확인하듯 흘끗 쳐다보는 버릇대로 그 집의 측면을. 집 뒤로 돌아가는 길을 쳐다보며 걸어갔습니다. 이번엔 단층 건물로 된 카페에 도착했는데. 처음 후원(後園)은 원경(遠景) 비슷했고. 두 번째 시골집은 중경(中景). 그리고 이 카페는 눈앞에 들이미는 듯 가까운 근경(近景)이었던겁니다.

카페 안엔 젊은 남녀가 여럿 앉아 있었는데 그 중 맨 가장자리에 앉은 남녀가 서로의 입술을 흡착판처럼 붙이고는 몸을 뒤틀고 있었습니다. 한때 애인이 있었던 나도 눈 오는날 카페에서 비슷한 일을 했는가. 이게 심정적으로 눈오는 풍경과 걸맞는 장면이었는지에 대해선 이 글을 읽는분들이 판단하십쇼. 씨익. 

카페를 지나자 어떤 골목 비슷한 곳이 나왔는데. 지지난 겨울에 놀러 갔던 교토의 골목에 들어선것 같다고 혼자 생각했습니다(모르긴 몰라도 교토에선 눈을 볼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골목은 곧 끝나고 트인 공간이 나왔습니다. 주위는 온통 흰 빛이었고 눈에 푹푹 빠지며 걸어가는 실루엣이 멀리 몇 개 보였습니다. 숨이 가쁜 듯. 가슴이 답답해졌고. 뭔가를 해야 한다고 꿈속에서 생각해내던 순간. 꿈은 암전이 되고 잠에서 깨어났지요.

그새 눈은 잠시간 그쳤더군요.

오래전부터 눈이 내리면 반가움과 막막함을 동시에 가지곤 했었는데. 눈이 온다며 전화를 하네 어쩌네 하는 라디오 멘트를 들으면.  

공연한 짓을 한다는 생각까진 아니지만.  먼 외국의 낯선 풍습처럼 여겨지기는게 사실입니다. 

그 풍습을 다시 익히려면 누군가 필요할테고. 씨익.

그런데 때묻은 청년이 소년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건가.  아무튼 제겐 올해 가장 풍성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진짜' 첫눈이 왔습니다. 꿈과 현실이라는 두 영역에서 말입니다. 이 꿈과 눈 쌓인 밤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제대로 된 눈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오늘 밤엔 맛좋은 술을 두어병 비웠다는 말입니다. 

아직 조금 부족한데. 어떻게 할지. 씨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