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전에 저도 이 영화를 봤는데 대단히 재밌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위험성이 많다는게 제 입장입니다.

영국적 전통이라는 명목하에 80년대 복고 취향을 차용한 이 영화는 패션 트렌드 뿐만 아니라 보수적 가치마저 채용하고 있습니다.

고인이 된 영화학자 로빈 우드가 그토록 날을 세워 비판했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이 영화는 고스란히 이어 받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 보여지는 여성 이미지는 정말 구닥다리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매맞는 엄마, 암호명과 달리 남성 캐릭터의 부수적 존재로서의 랜슬롯)

영화 시작이 카세트 테이프를 보여주면서 시작하는 것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유사합니다. 할리우드가 찬란했던 80년대를 재현해보고 싶은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죠. 그리고 악당들은 유심칩을 이용해서 세계를 바꾸려는 디지털 세대, 하위문화의 숭배자들입니다. 전통과 현대, 상위문화와 하위문화를 충돌시키면서 서사를 이끌어 나가고 전통과 상위 문화를 찬양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스타일은 대단히 키치적입니다. 

 

현란한 편집, 속도감 있는 전개, 톡 쏘는 유머 등으로 볼 거리는 풍부하지만 이어 받아야 할 전통과 말아야 할 전통을 구분하지 못하므로서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의심스러운 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이데올로기 잣대를 들이대며 그토록 비난하던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하서는 시치미를 뚝 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문제만 놓고 본다면 제가 보기엔 <킹스맨>이 훨씬 심각하거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지나칠 정도로 재밌다는 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쓸데없이 <킹스맨> 이야기가 길어져 버렸네요.

현재 극장가에는 보석 같은 영화들이 숨어서 상영되고 있습니다.

그 영화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이전에 제가 숏 바이 숏으로 소개한 <이다>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흑백 영상을 보여줍니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을 연상케 할 만큼 뛰어난 장면들이 많기에 사진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도 추천합니다. 출생의 비밀을 가진 수녀의 이야기인데 역사적 슬픔이 한 개인의 삶과 연관되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영화관에서 막을 내려야 할 시점이니 서두르시길 바랍니다.

사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사진과 관련된 영화가 두편 더 있습니다. <나이트 크롤러>는 시청률과 언론 조작에 대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 자체는 사진과 무관하지만 사건 현장을 비디오에 담아 언론사에 팔아먹는 영화 주인공이 전설의 사건 현장 사진작가 위지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30, 40년대에 활약했던 위지는 사건 현장에 누구보다 빨리 달려가 시체들을 모델로 해서 카메라 셔트를 눌러 댄 사람입니다. 사건 현장이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가지고 다니던 하이힐 한짝은 일부러 프레임 안에 던져 놓고 말입니다. <나이트 크롤러>는 저도 아직 못 봤는데 위지가 생각나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실제 사진 작가를 다룬 다큐도 있습니다. 전쟁과 기아의 현장을 다룬 전설의 사진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두의 삶을 그린 <제네시스 - 세상의 소금>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빔 벤더스입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거장이 사진의 거장을 담고 있는 다큐입니다. 재밌는 것은 빔 벤더스가 사진의 거장을 존중하되 영화적 매체의 특성을 포기하지 않고 살가두의 사진 세계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살가두의 감동적인 삶 외에도 스크린에 보여지는 영화와 사진의 팽팽한 긴장감을 엿볼 수 있다는게 이 영화의 장점입니다. 재미 없을 것 같다구요? 영화관에 불이 켜지면 벅차오르는 감동으로 일어나 있는 솜털과 함께 같이 자리에서 일어 날 겁니다. 꼭 보세요.

벅차오르는 감동. 그것을 음악으로 느끼고 싶다면 데미안 체즐의 <위플래쉬>를 보십시오. 이 영화는 이미 개봉 전에 제가 이 곳에서 추천을 했습니다. 특히 이 영화는 음악과 편집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에 주목해서 보시길 바랍니다. 음악 영화에서 핵심은 음악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보여주냐에 있습니다. 만약 이 영화에서 악기가  드럼과 같은 타악기가 아니라 현악기나 관악기였다면 편집 방식이 달라졌을 겁니다. 영화 마지막에 드럼 연주에 등장하는 세련된 편집에 관객들의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해 볼만합니다. 그 외에도 이 영화는 시점 숏, 숏 사이즈 배분, 카메라의 위치 변화 등을 따져가며 볼 필요가 있는 영화입니다. 딱 잘라서 말한다면 이 영화를 놓치면 재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편의 영화가 있습니다. 저도 아직 안봤지만 작년 말부터 해외 언론에서 하도 떠들어서 토렌트를 총동원해서 찾아다녔지먀 포기했던 영화. <포스 마쥬어 - 화이트 베케이션>. 제목 그대로 겨울 휴가를 떠났다가 '불가항력의' 재난을 당하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아직 보지 못한 미지의 영화는 저를 영화관으로 이끄는 불가항력의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번 주말에 영화의 저항 불가능한 마력에 빠져들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