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5일.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황금사자기 준결승전은 2학년 두 왼손 투수가 펼치는 팽팽한 투수전으로 뜨겁다 못해 불타올랐다. 준결승전까지 3경기에 나와 2승 1세이브, 29탈삼진을 거둔 안산공고 김광현은 이름값에 걸맞게 성남서고의 타선을 8회까지 거의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하지만 안산공고의 타선 역시 성남서고의 왼손 투수를 공략하지 못하며 9회 초까지 0-0. 기나긴 0의 행렬에 종지부가 찍힌 것은 9회 말이었다. 성남서고는 2사 2루에서 신민철이 김광현의 초구를 좌중간 끝내기 안타로 연결해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8.2이닝 동안 4피안타 1실점 14탈삼진을 기록한 김광현은 팀 타선의 도움을 받지 못하며 패전의 멍에를 섰다. 반면, 성남서고의 왼손 투수는 9이닝 완봉승을 거두며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다. 초고교급 투수 김광현과의 맞대결에서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은 성남서고 왼손 투수의 이름은 이천웅이다.

이천웅은 고교 시절 SK 김광현을 두 번 울린 것으로 유명하다. 한 번은 2005년 황금사자기 4강에서 맞대결을 펼쳐 1-0 완봉승을, 또 한 번은 연습경기에서 홈런을 쳤다. 이천웅은 김광현을 다시 만나길 바란다. 1군 무대에서 타자와 투수로. (사진=손윤)

“(김)광현이를 한 번도 제 라이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광현이가 저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담 없이 던진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아요. 9회 말에 2루 주자(김동연)가 들어올 땐 정말 짜릿했죠. 저절로 양손이 번쩍 올라가더라고요. 진짜 투혼을 다해서 경기에 집중하고 집중했지만 이길 줄은 상상도 못했죠. 경기 전날 밤에 ‘야구에 일등이 어디 있고 꼴등이 어디 있냐!’며 각오를 다졌는데 바람대로 되더라고요. 꿈은 이루어진다는 걸 그때 느꼈죠.”

이천웅은 이때를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지금까지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고 밝혔다. 사실 이천웅의 야구 인생은 곤경의 연속이었다. 지금이야 182cm에 83kg의 당당한 체구를 자랑하지만 중학교 때까진 작은 체구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어릴 때 체격 조건은 정말 작았어요. 하체 등은 단단했지만 짤막했죠. 주위에서 너는 많이 커봤자 170cm라고 말해서 걱정을 많이 했죠. 부모님이 진짜 노력을 많이 하셨어요. 제가 잘 때 키 크라고 다리 마사지도 해주시고 키에 좋다는 것은 다 해주셨어요. 그러면서 항상 아버지가 크니까 클 거라고 긍정적으로 이야기해주셨고요. 고등학교 1학년 말부터 키가 크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등에 키가 갑자기 큰 자국이 남아 있어요. 갑자기 크면서 몸이 아팠지만 마음은 즐거웠어요. 또 야구도 잘 됐고요.”

이천웅은 200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SK에 2차 6순위로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SK가 아닌 고려대. “할아버지가 정말 고려대에 가는 것을 원하셨어요. 또 저도 대학에서 더 기량을 갈고 닦고 싶었고요.” 황금사자기 이후 팔과 허리가 안 좋아 가장 중요한 고교 3학년 때는 투수를 거의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고려대에 진학한 뒤 이천웅은 당시 고려대 감독이던 양승호 롯데 감독과 면담을 했다. 양 감독은 이천웅에게 “투수와 야수 가운데 어느 쪽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이에 이천웅은 망설임 없이 “투수를 하고 싶습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양 감독은 “투수는 3, 4학년 하고 1, 2학년 때는 야수를 해봐라”고 조언했다. 투수보다 타자로서의 재능을 더 높게 봤기 때문이다. 

“(양승호) 감독님이 1학년인데도 첫 대회에 4번 타자로 내는 등 계속 기용해주셨어요. 하지만 제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죠.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2학년 올라갈 때 감독님한테 투수를 하고 싶다고 말했죠. 그래서 투수를 다시 시작했는데 투수랑 야수랑 쓰는 근육이 다르잖아요. 충분히 투수 몸을 만들지 않은 상황에서 힘으로 던지다가 보니까 부상이 왔어요. 어깨에.”

이천웅은 어깨 부상으로 대학 4년 동안 투타 어느 쪽에서나 변변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2010년 8월 1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호텔에서 개최된 2011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이천웅의 이름은 어느 구단에서도 불리지 않았다. 남긴 결과물이 없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그는 실망감에 마음을 쉽게 추스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날 울었어요. 지명을 받을 걸로는 기대 안 했거든요. 제가 한 게 있으니까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게 현실로 다가오니까 시쳇말로 ‘멘붕’(멘탈붕괴의 줄임말로 당혹스럽거나 창피한 일을 당해 정신이 나간 듯한 상태를 가리킨다) 상황이었어요. 정신적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거죠. 제 야구 인생이 여기에서 끝나는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때 옆에서 저를 잡아주신 분이 박철홍 당시 고려대 코치님이세요. 지명을 못 받아도 프로에 못 가는 건 아니라며 많이 다독여주셨어요.”

신인 드래프트 다음날 이천웅은 LG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지명 안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신고 선수로 함께 하자”고. 이에 그는 “신고 선수로 프로 유니폼을 입지만 반드시 성공하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이천웅은 LG를 상징하는 단어로 ‘팀워크’라고 말했다. 세간의 평가와는 다른 말. 이에 대해 “1군에서 누군가 부진하거나 다쳐야 올라갈 수 있는데 선배님들도 그렇고 누구나 다친 선수를 먼저 걱정한다. ‘나’가 아닌 ‘팀’을 생각하는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구리 LG챔피언스파크에 걸린 문구가 문구로 끝나지 않고 실제 상황이 된 것이며 LG의 밝은 미래를 나타내고 있다. (사진=손윤)

신고 선수는 프로야구계의 비정규직이다. 대부분 계약금이 없는데다가 정규 선수보다 적은 연봉을 받는다. 이천웅은 신고 선수를 “빙판길 위는 걷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1년 계약이라 언제든지 해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초 그는 투수로 LG 유니폼을 입었지만 이내 타자로 변신했다. 차명석 투수 코치가 투수보다는 타자로서의 가능성을 더 높게 봤기 때문이다. 

“작년 3월 말부터 다시 야수를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배트도 바로 안 줬어요. 일단 야수 몸을 먼저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본 거죠. 외야 수비 연습이랑 티배팅 연습만 한 달 정도 했어요. 그때 김기태 감독님이 다른 선수들한테 한두 마디씩 해주는 걸 옆에서 듣고 그걸 제 걸로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또 지금은 상무에 계신 허문회 코치님이 많이 도와주셨고요. 두 분 다 왼손 타자 출신이라서 제가 더 귀를 기울였던 것 같아요. 올해는 서용빈 코치님이 진짜 많이 도와주시고 있어요. 항상 자신 있게 타격하라고 조언하세요. 어떤 투수가 올라와도 안타를 치면 내가 잘 친 거고 그렇지 않으면 상대가 잘 던진 거라면서요. 정말 타자는 자신감이 중요한 것 같아요.”

올해 이천웅은 퓨처스리그에서 한때 4할에 가까운 타율로 장성우, 나성범 등과 치열한 1위 다툼을 펼쳤다. 현재(6월 1일)는 퓨처스리그 양대리그를 통틀어 타율 6위(0.341)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런 활약에 LG는 6월 1일 자로 이천웅을 정식 선수로 등록했다. 한 가지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 제 목표는 1군 무대입니다.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겠죠. 기회가 안 온다고 실망만 하거나 기다리기만 하면 막상 그 기회가 왔을 때 잡지 못할 테니까요. 이전까지 정식 선수라는 문을 두들겼고 그 문이 열렸어요. 하지만 1군 무대라는 또 다른 문이 제 눈앞에 있어요. 이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들겨야죠. 두들기다 보면 언젠가는 열릴 것으로 믿어요.”

생긴게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