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뻘글은 꼭 평어체로 써야할 듯 한 생각이 드네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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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내가 '차가운 도시 남자'라는 말을 처음 접한 건 불펜에서였다. 아마도 플라키아님의 댓글에서 처음 봤던 것 같다.


차가운 도시남자...


은근히 입에도 착 붙고 뭔가 있어보이는 게 내심 아주 맘에 들었다. 하지만 내 입으로 '차가운 도시남자'라 칭하려니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스스로를 '차가운 도시 남자'라고 칭하는 유저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걸 확인하고 난 뒤에서야 은근 슬쩍 뭍어가는 말로 몇 번 쓰곤 했다.


얼마 전 습관처럼 이 말을 쓰다가 아주 당황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차가운 도시 남자가 뭔데?'라는 동생의 질문에 우물쭈물 제대로 설명을 못하고 '그냥 그런게 있어!'라고 버럭 화만 낸 것이다. 그냥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들을 읽어보라고 하면 될 것을...


생각난 김에 챈들러의 소설들을 다시 꺼내 읽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을 읽는 내내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모유저가 자꾸 생각이 난다. 신입 유저 인사글엔 언제나 '불펜에서 제일 어린 XXXX입니다. 거칠게 다뤄주세요'라고 댓글달곤 하는, 얼마전까지는 '유사인증 놀이'에 흠뻑 빠져 있던 그 유저 말이다.


아마 챈들러의 소설과 모유저의 글을 함께 읽어 본 분들이라면 동의하리라. 독설과 시니컬한 유머 뒤에 숨겨진 따뜻함과 삶의 진실. 거칠고 건조한 듯 하면서도 읽는 재미가 느껴지는 독특한 문체.


왜 갑자기 저격글(?)로 흐르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챈들러의 소설 속 여성들은 '팜므 파탈'이 대부분이지만 그는 부인을 엄청나게 사랑했던 애처가(혹은 공처가)였다. 오죽하면 부인이 먼저 죽고 난 뒤 슬픔에 빠져 술만 마시다가 죽었겠는가?



 




1.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들은 보통 '추리소설'로 분류되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추리소설'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당신이 줄거리나 사건, 트릭을 강조하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추리/미스터리 소설을 즐기는 팬이라면 아마도 챈들러의 작품들에 열광하기보다는 실망할 확률이 더 클 것이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가 가졌던 빛나는 이성, 크리스티 여사의 포와로 경감이 가졌던 사고의 진중함,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가 보여주었던 지혜로움에 매료되었던 당신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돋보기를 들고 혹은 안락 의자에 앉아 자신들의 지성을 시험하듯 하나씩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이들에게선 여가시간에 심심풀이 삼아 두뇌게임을 즐기는 듯한 부르주아지의 여유로움이 뭍어난다.


반면, 챈들러의 페르소나 필립 말로Philip Marlowe는 더러운 사무실에 앉아 싸구려 시가를 피우며 의뢰인을 기다린다. 그는 “문에서 버저가 울리고 대기실로 향하는 안쪽 문을 열면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여 새로운 문제와 새로운 슬픔, 약간의 돈을 안고 들어” 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겨우 몇 백 달러에 목숨을 걸고 미로처럼 뒤엉킨 범죄의 한복판으로 몸을 던진다. 이것 저것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어서 월세를 걱정한다. 그는 머리보다는 몸이 먼저 움직이는 타입이라 맡은 사건을 깔끔하게 해결하기는 커녕 오히려 일을 더 커지게 한다. 악당들을 시원하게 패주는 대신 쥐어터지는 것은 옵션인 그런 인간이다.


183㎝, 85㎏, 33살, 전직 경찰이었으나 지금은 생계형 사립탐정인 독거노인. 큰 키 하나 빼고는 속된 말로 허접한 스펙이다.


그런데도 <달콤한 나의 도시>를 쓴 소설가 정이현은 “셜록 홈스와 필립 말로. 둘을 한 공간에 나란히 세워 놓고 뭇 여성들에게 ‘남자’로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대부분 망설임 없이 말로 쪽을 택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도대체 왜?


필립 말로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정의의 투사도, 영웅도 아니다. 낭만적 냉소주의자라고나 할까? 그는 더도 덜로 아니고 딱 일한 만큼만 돈을 받으며, 일단 돈을 받으면 그 값을 하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걸기도 하는 '프로' 사립탐정일 뿐, 애당초 사명감 따위는 없는 인간이다.


다시 정이현의 말을 빌리자면, "이 고독한 ‘싸나이’는 ‘세상의 악을 소탕하고 범죄를 응징하는 업무. 그런 위대하며 중차대한 직분을 맡은’ 사람이지만 결코 영웅무훈담의 흠결없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폐부를 찌르는 냉소와 비정한 웃음으로 '버티는' 자이다."


온갖 부패와 범죄가 들끓는 30년대 말~50년대의 LA를 배회하는 이 고독한 늑대같은 사내는 당대의 타락과 위선을 혐오하고 배척하는 대신, 냉소와 조롱, 연민과 익살로 헤쳐나간다. 그는 이 세계가 인간의 선의를 비웃는 온갖 악덕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악의 근원은 거대한 권력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만 그것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되기는 커녕 그가 발을 들여놓으면 일은 더 꼬이고 그는 점점 더 악의 늪 속으로 빠져들 뿐이다.


진짜 악당들과 진짜 사기꾼들이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고 경찰을 조롱하며 함부로 세상을 휘저을 때, 그리고 그런 세계의 냉혹함과 비정함, 모든 노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는 현실 세계의 거대한 장벽을 느낄 때, 챈들러는 그리고 그의 친구인 이 지독한 염세주의자 탐정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남자라면 이 비열한 거리를 통과하여 걸어가야 한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2.

"챈들러를 '추리작가'란 틀 안에 가두는 것은 그를 너무 낮게 평가하는 것이다. 그는, 좋은 소설이 무엇인지, 좋은 묘사란 무엇인지, 매력적인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고, 흡인력 있는 스토리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아는 몇 안 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한다. 그에 대한 이런 평가가 못마땅하다면,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펴서 한 대목의 대화나, 한 문단 정도의 묘사를 읽어보라. 이미 책을 폈다면 한두 페이지를 읽는 것만으로는 책을 덮을 수 없겠지만."

“ ‘필립 말로’ 시리즈는 정직한 한 인간이 부패한 사회에서 고귀하게 살아가려는 분투를 담고 있습니다. 그 분투에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거나 시니컬해지거나 삶에 관한 경구를 내뱉거나 간혹 정사를 즐기게 될 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는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처럼 사악해지고 남의 비위나 맞추며 무례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로 또래의 젊은 남자가 고상하게 부를 누릴 수 있을까요. 부정하지 않고서야 성공할 수 없는 냉혹하고도 분명한 현실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타락시키지 않고 말입니다.”- 챈들러가 존 하우스만(영화제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챈들러의 작품들이 가지는 매력은 그 특유의 스타일리쉬함이다. 세상을 비웃는 문체는 현대사회의 비정함을 드러내는데 적절하고, 직관적이면서 거친듯한 문제는 현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생생하다. 또한 특유의 직유법에서 나오는 치밀하고 집요한 묘사는 읽는 재미를 더한다.


따라서 그의 글은 반드시 '천천히' 읽어야 한다. 뜨겁고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며 음미하듯 그렇게 읽어야 한다.

“장군은 다시 천천히, 일자리를 얻지 못한 쇼걸이 마지막 남은 고급스타킹을 사용하듯 조심스럽게 힘을 사용해서 말했다.”


“베이시티에서는 그 이유만으로 당신을 죽여버릴 수 있었어.”(경찰) “베이시티에서는 파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날 죽일 수 있었겠지.”(말로) “그 이유만으로 당신을 영업정지시킬 수 있었어.”(경찰) “고려해보시지. 난 이 직업을 좋아한 적이 없었거든.”(말로)

"인생의 비극은 아름다운 것들이 젊어서 죽는다는 데 있지 않아요. 다만 아름다운 것들이 늙고 추잡해지는 데 있는 것이지요."


"전화를 끊자 나는 체스판을 꺼냈다. 나는 파이프를 채우고 체스말들을 사열하여, 프랑스식으로 면도했는지, 단추가 헐렁해진 데는 없는지 검사하고 나서 고르차코프와 메닌킨의 챔피언 결정전을 복기해보았다. 72수만에 끝나는 경기로, 꿈쩍하지 않는 상대를 만난 무적의 군대, 갑옷 없는 전투, 무혈의 전쟁의 훌륭한 견본이었으며, 광고회사를 제외하면 세상에서 가장 정교한 인간 지성 낭비의 정수였다."

"하루에 24시간, 누군가는 도망가고 누군가는 잡기 위해 노력한다. 저 바깥, 천 가지의 범죄가 일어나는 밤에 사람들은 죽어가고 폭행을 당하며, 날아오는 유리에 베이고, 운전대에 부딪히거나 무거운 타이어 밑에 깔린다. 사람들은 얻어맞고, 강도를 만나고, 목이 졸리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굶주리고 병에 걸리며 지루해지고, 외로움이나 복수심, 공포땜누에 절망적이 되고 분노하기도 하고 잔인해지기도 하며 열에 들뜨고 몸을 흔들며 흐느끼기도 한다. 다른 도시보다 더 나쁠 것도 없는 도시, 부유하고 활기차고 자부심으로 가득 찬 도시,잃어버리고 얻어맞고 공허함으로 가득찬 도시. 모든 것이 다 어느 자리에 앉아 있는지, 개인이 따놓은 점수가 얼마나 되는지에 달려 있다. 나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니 신경 쓸 것도 없었다."

'빅 슬립'에서 33살 청년이었던 말로는 '안녕 내사랑' '하이 윈도' '호수의 여인' '리틀 시스터' '기나긴 이별'을 거치며 자신만의 아름답지만 고독한 감성의 세계를 점점 다듬어 나간다. 물론 세월의 흐름은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야성미 넘쳤던 말로가 어딘가 모르게 기운 빠진 중년의 사내로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서글프다.


하지만 어쩌랴. 그게 바로 사내의 일생인 것을.

"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만들었다. 많은 양의 커피를, 진하고, 강하고, 쓰고, 끓을 정도로 뜨거우며, 가차없고 타락한 커피를.
 지쳐버린 남자의 인생의 피."

자, 이제 부엌으로 가서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준비하자. 그리고 '원조' 차가운 도시 남자, 말로를 만나러 가자.





ps.

말로야 말로 COB의 살아 있는 화신이라 할 만 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부 혹은 연인은 말로와 인연을(?) 맺는 순간, 불륜을 들키거나 한 쪽이 죽거나. 어쨌든 헤어진다. =_= 




[이 게시물은 영계소문님에 의해 2009-02-27 12:31:33 불펜 게시판에서 복사 됨] [이 게시물은 ∥네로울프∥님에 의해 2009-02-27 17:53:34 관리자전용게시판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