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야구가 재밌냐라는 질문을 많이 접하긴 합니다. 이기는 야구가 재밌다는 분이 많기는 하지만 저와는 다른 것 같아요. 제가 사면서 이기는 데서 삶의 재미를 찾지는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미를 찾는 부분도 어느 부분은 자신의 인생관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각설하고 제가 어떤 야구를 재밌게 느껴보는 지를 좀 풀어보겠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열심히 하는 야구를 좋아합니다. 진지하게, 정말 열심히 하는 야구요. 순간 순간을 즐기며 그 순간의 플레이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는 야구 선수를 보면 저는 너무나 즐겁습니다. 화가가 일획을 그을 때 처럼 무아지경이 되어서 다음 플레이를 위해 온 몸으로 집중하고 있는 그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래서 고영민이 좋습니다. 고영민이 야구하는 것을 보면 정말 미친 듯이 합니다. 특히 수비와 주루를 할 때면요. 지난 한화와의 경기에서 나온 기민한 고영민의 플레이를 보면 그의 아름다운 야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영민은 이번 시즌 내내 부상을 달고 살았습니다. 수없이 몸을 때리는 사구와 몸을 사리지 않는 수비와 주루때문에 그의 몸은 만신창이입니다. 이러한 부상때문에 고영민은 이번 시즌 야구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라운드에 나가 자기 맘껏 플레이하고 싶었지만 회복되지 않은 몸과 오재원의 질주로 인하여 기회를 잡지 못했지요.

부상에서 회복되어 주전으로 출전한 지난 한화와의 경기, 2루타를 치고 나서 내야땅볼 때 고영민은 3루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상황 1사 3루 오재원의 타석, 한화의 내야진들은 0:0의 상황을 지키기 위해 전진 수비합니다. 데폴라는 몸쪽 낮게 제구하며 최대한 오재원에게서 내야 땅볼 혹은 내야 플라이를 이끌어 내어 점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한화의 집념이 통했는지 오재원이 친 타구는 오선진에게 빠르게 굴러가 잡혔습니다. 이때 고영민은 톡톡 뛰며 오선진의 플레이에 박자를 맞춥니다. 오선진의 다음 플레이에 따라 3루쪽으로 갈지, 홈으로 갈지를 결정하기로 하고 템포를 맞추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오선진이 1루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미 몸이 공중에 있던 고영민은 오른쪽으로 착지를 하는 동시에 홈으로 질주합니다. 당황한 1루수 장성호는 급히 홈에 송구하지만 공이 도착할 무렵에 이미 고영민은 포수의 블로킹을 돌아들어가는 슬라이딩을 끝마치고 덕아웃으로 몸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인터뷰때 이효봉 해설이 무슨 생각으로 그리 플레이했냐 물었더니 고영민은 아무 생각이 없었고 타이밍과 오선진의 플레이를 보고 아무 생각없이 홈으로 뛰었다 합니다. 이 대답을 들으며 정말 고영민 답다고 생각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모두 다음 플레이를 위해 준비해 놓고 찰나의 순간 감각적으로 선택한 후 무아지경이 되어 플레이하는 것! 이것이 고영민입니다. 이런 고영민의 플레이를 보고 즐겁지 않으면 무엇이 즐겁겠습니까? 이 경기의 끝이 끝내기 역전 투런 홈런으로 인한 패배였다 하더라도 고영민의 플레이가 준 즐거움은 정말 오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오늘 본 정수빈의 플레이도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정수빈이 8회 말 김동주의 대주자로 들어온 순간 부터 저는 정수빈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감탄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수빈을 보는 것은 고영민을 보는 것과는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정수빈을 보면 왜 이 친구가 두산에 있는지 잘 이해가 안갈 때가 많습니다. 정수빈은 두산의 2009년 2차 5순위 지명입니다. 2차 지명 순번이 무려 39번째 각팀의 1차 지명자까지 합하면 전체 47번째로 지명된 선수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정수빈의 플레이를 보면 정수빈이 왜 이 정도까지 순위가 밀렸는지 의아할 뿐입니다. 수비와 주루에 있어 정말 기본기가 탄탄하고, 타격에서도 누구보다 강한 투지를 불태우는 선수거든요. 청소년대표까지 한 선수이니 이 정도의 선수가 눈에 안띌리 없었을 텐데 두산의 2차 5순위에 지명될 수 있었다는 건 정말 고마울 따름입니다. 지난해부터 보인 정수빈의 활약은 A4용지 몇 장에써도 모자랄테니 제가 오늘 보고 경탄한 그의 플레이를 잠깐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정수빈이 기아 투수들과 야수들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8회말부터였습니다. 그의 기용이 늦은 건 김현수-이종욱-이성열의 벽에 부딪혀 복귀 후 4할의 타율과 0.960의 OPS를 기록함에도 백업 야수로 밖에 뛸 수 없기 때문이죠. 무사 2루, 주자는 민병헌, 최준석이 유격수와 2루수 사이를 뚫는 안타를 칩니다. 타구가 빨랐기에 민병헌은 3루에 멈출 수 밖에 없었고, 최준석도 1루에 안착. 김경문 감독은 추가점을 원하였고 최준석 대신 정수빈을 1루에 기용합니다. 기민한 민병헌과 정수빈이 각각 3루와 1루에 있자 기아 배터리는 당황을 했는지 유재웅의 타석에서 공을 뒤로 빠트리고 말고 민병헌은 여유있게 홈으로 들어옵니다. 이때 정수빈은 당연히 2루로 갔습니다. 하지만 이 때 정수빈의 플레이는 특별했습니다. 6-2 상황, 조금은 여유를 보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정수빈은 2루를 돌기 직전 가속을 합니다. 가속을 하며 홈을 한 번 흘끗 보고 포수 김상훈이 행여나 실수를 하지 않는지를 보며 3루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플레이는 기본입니다. 그러나 이 기본을 할 줄 아는 선수는, 특히 고졸 2년 차 선수는 그리 많지 않지요.

이후 상황에도 정수빈의 기본기는 여실히 발휘됩니다. 유재웅의 중견수 플라이 때 정수빈은 3루로 깔끔히 태그업 합니다. 유연하고 빠른 슬라이딩은 덤이지요. ^^ 그리고 손시헌의 타석. 손시헌은 아마도 몸쪽 공으로 추정되는 공을 빠르게 당겨쳤습니다. 한 점을 지키기 위해 전진 수비하고 있던 이현곤은 빠르게 뒤로 물러 나며 강한 손시헌의 타구를 잡아내지요. 이 때 정수빈은 타구를 끝까지 보고 살짝 앞으로 움직이는 모션만 취하고 바로 3루로 귀루 합니다. 1사 3루 상황 많은 선수들이 내야 땅볼에 무리한 질주를 하곤 하지만 이 고졸 2년차 대주자는 기본에 충실한 플레이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히 해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양의지의 적시타에 그에게 주어진 임무, 홈을 밝는 것을 완수하고 덕아웃으로 향했습니다.

고영민과 정수빈은 조금 다른 스타일의 선수지요. 고영민과 정수빈 모두 빠르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요. 고영민은 올림픽에서의 어이없는 스텝으로 병살을 연결시켰던 것을 보아도 기본기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선수입니다만 온 몸이 감각으로 똘똘뭉친 선수이지요. 이에 반해 정수빈은 착실한 스타일입니다. 물론 상당히 빠르기 때문에 다른 선수, 예를 들면 의지준석,에게는 무리하다고 여겨진 플레이도 과감히 해나가는 듯한 인상을 주긴 하지만 누구보다 기본기에 충실합니다. 이렇게 스타일은 다르지만 이 선수들을 보는 것은 각기 스타일에 따른 재미를 줍니다. 이 선수들도 때론 실패와 실수를 하곤 합니다. 그 실수가 팀을 플레이오프에서 탈락시키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정말로 열심히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이들의 플레이를 보았기에, 이들의 플레이를 가을에도 볼 수 있었기에 저는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이기지 않아도 고영민과 정수빈 같이 열심히 하는 선수만 있다면 저는 충분히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