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제리 로이스터 롯데 감독을 만났을 때다. 그는 1시간 남짓한 인터뷰 동안  ‘No Fear(두려움 없이)’라는 말을 무려 38번이나 썼다. 이유가 있었다.

로이스터 감독의 말에 따르면 롯데의 첫 인상은 두려움으로 충만한 팀이었다.
선수들은 사소한 플레이 하나도 벤치의 눈치를 살피기 일쑤였고 특히나 도루자나 주루사를 당하면
멜라민이 잔뜩 발라진 과자라도 삼켰는지 더그아웃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약팀의 관례상 실수는 비주전이나 2군행을 뜻하게 마련이었다.

팀을 둘러싼 ‘두려움’의 그늘을 없애는 일이 자신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확신한 로이스터 감독은
선수들에게 적극적인 플레이를 강조하며 ‘No Fear(두려움 없이)’를 구호로 삼기 시작했다.

“두려움 없이 적극적인 플레이를 하기 위해선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
설령 적극적인 주루를 하다 홈에서 아웃됐다고 해도 선수를 질타하거나 책망해선 안 된다.
그럴 때 감독은 박수를 치면서 격려하고 다음에도 똑같은 플레이를 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로이스터 감독은 그의 말대로 인내심을 갖고 선수들을 지켜봤다.
 적극적인 주루로 아웃이 됐든 아니면 야구에서 최악의 아웃으로 불리는 ‘견제사’를 당하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되레 소극적인 플레이를 할 경우 불호령이 떨어졌다. 왜냐?
로이스터 감독에게 눈앞의 실수란 동전의 양면처럼 미래의 성공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려움 없는’ 롯데의 플레이는 결국 8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로 연결됐고 로이스터 감독의 리더십은 한국야구계에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물론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의 ‘두려움 없는’ 야구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잦은 주루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는 ‘두려움 없는’ 야구의 한계라기보다는 적극적인 플레이가 정착하는 과정이라 보는 것이 온당하다.
개인 신용도에 대한 은행의 자세가 한순간에 변하지 않듯 선수들도 그들의 플레이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다소간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어쩌면 한 시즌만에 180도 달라진 팀 플레이를 기대하는 게  ‘탐.욕’일지 모른다.
내년시즌엔 좀 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롯데의 ‘두려움 없는 야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년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면 이미 ‘두려움 없는’ 야구가 정착된 다른 팀의 경기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두산이 그런 팀이다.

지금의 1패는 내일의 10승

4월 29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지는 KIA와의 경기를 앞두고 두산 김경문 감독은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꺼냈다.
“네? 오재원을 3번 타자로 쓰시겠다고요?” 김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젊은 타자인 만큼 중심타자의 중책을 맡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두산은 9승 13패로 KIA에 이어 리그 7위를 달리고 있었다. 젊은 선수를 여유롭게 시험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오재원은 주로 1루수를 보며 6, 7번 타순에 배치돼 있었다.
성적도 입이 쫙 벌어질 만큼 대단한 게 아니어서 이 경기 전까지 타율 2할7푼7리, 3타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오재원의 3번 기용을 듣고 김광림 타격코치도 “(고)영민이가 아니라 (오)재원이?”하며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다.

오재원 본인은 더 했다. “제가 3번 타자면 손에 장을 지지겠습니다”라며 “농담 좀 하지마세요”라고 멋쩍게 웃기만 했다.
1시간 뒤 그는 손에 장을 지지는 대신 그 손에 배트를 쥔 채 1회 3번째 타자로 타석에 들어섰다. 결과는 4타석 4타수 1안타, 1볼넷.

다음날 오재원에게 3번 타자의 경험담을 들려달라고 했을 때 그가 한말은 “누군가 날 믿고 있다는 게 기뻤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한결 자신감이 붙은 표정으로 “다음번에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김 감독도 비록 팀이 2-6으로 패하긴 했지만 오재원의 기용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 반대였다.

“만약 오재원을 기용해 졌다면 그건 1패에 불과하지만 차후 자신감을 얻은 오재원이 가져다 줄 10승과 비교하면 전혀 아쉽지 않은 결과”라는 게 당시 김 감독의 진심이었다.

오재원은 이 경기 이후 4번 타자로 12경기, 5번 타자로 9경기에 나오며 주전으로 뛴 78경기에서 중심타자로 22경기에 출전했다.
프로 2년 차에 전해 성적이 고작 타율 2할5푼9리, 5타점에 불과했던 타자치고는 과분한 경험이었다.
‘두려움 없이’ 젊은 타자에게 수시로 경험을 쌓게 한 김 감독과 감독의 배려를 ‘두려움 없이’수행한 오재원은 결국 플레이오프 삼성전에서 결실을 맺고 있다.

10월 17일 삼성과 두산의 플레이오프 2차전 3회말 1사 2, 3루에서 두산 오재원이 2타점 3루타를 때리고 있다(사진=두산)

‘두려움 없는’  영리한 질주

오재원도 오재원이지만 두산의 ‘두려움 없는’ 야구의 결정판은 ‘발야구’다. 두산은 올시즌 팀 도루 189개로 이 부문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두산의 ‘발야구’를 도루수로 한정하는 건 단견이다. 그보단 ‘두려움 없는’ 적극적인 주루에서 찾는 편이 낫다.

올시즌 두산은 1루 주자 시 단타가 나온 364번의 기회 가운데 1루 주자가 3루까지 진루한 경우가 98번에 이르렀다.
8개 구단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로 그만큼 적극적으로 진루를 시도했다는 뜻이다.
특히나 고영민은 1루 주자 시 단타가 나온 54번의 기회 가운데 23번이나 3루로 진루해 이 부문 1위에 올랐다.

지방 모팀의 주루코치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고영민을 지켜봤지만 다른 선수에 비해 주력이 월등히 좋거나 센스가 뛰어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며 “
(고영민이) 2년 연속 35도루 이상을 기록하고 히트 앤 드런 시 성공률이 높은 건 타고난 재능과 연습보다는 몇 년째 이어져온 두산의 팀 칼라와 비전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확한 지적이다. 김경문 감독이 부임하기 전 두산은 2003년 팀 도루 58개로 창단 이래 가장 적은 팀 도루를 기록했다.
한 시즌 경기수가 80경기에 지나지 않았던 1982년에도 OB(두산의 전신)의 팀 도루가 60개였으니 133경기를 치른 2003년 팀 도루 58개는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두산에 팀 도루 부족분을 보충할 장타력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2003년 두산은 90개의 팀 홈런을 기록하며 이 부문 리그 7위에 머물렀다. 특히나 1998년 이후 처음으로 팀 홈런 100개 이하를 기록한 것이라,
당시 야구전문가들은 팀 도루와 팀 홈런의 동반저하를 겪는 두산의 앞날을 회의적으로 내다봤다.

10월 16일 삼성과 두산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두산 이대수가 3루에 안착한 뒤 환호하고 있다(사진=두산)

김 감독 역시 몇 년 안에 팀의 장타력이 회복될 리 없다는 전망을 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2004년 이후 팀 홈런은 올시즌까지 89-63-55-75-68개로 꾸준히 떨어졌다. 정작 김 감독이 승부수를 던진 건 주루였다.

두산은 2003년 팀 도루 58개를 기록한 뒤 2004년부터 올시즌까지 71-103-132-161-189개로 꾸준히 늘었다.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 사상 한 팀의 팀 도루가 5년 동안 28개 이상씩 꾸준히 증가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한 베이스 더 진루하려는 두산 선수들의 적극적인 주루 역시 나머지 7개 구단의 공포의 대상이 됐다.

김 감독이 팀의 미래를 예견하고 그에 맞는 팀 칼라를 만든 사이 두산은 2004년 이후 올시즌까지 2번의 한국시리즈 진출과 역시 2번의 플레이오프 진출 성과를 거뒀다.
롯데와 함께 투자가 빈약하기로 소문난 두산에서 거둔 성적이기에 더욱 빛이 나는 성과였다.
그렇다면 김 감독의 ‘발야구’가 성공한 배경은 무엇일까.

김 감독이야말로 원조 ‘No Fear(두려움 없이)’다.
2004년 감독 부임 이래 김 감독은 주루사와 도루자에 관해선 선수들에게 일체 책임을 묻지 않았다.
웬만한 도루는 감독의 지시 없이 선수 개개인이 판단하는 ‘그린 라이트’로 진행됐고 진루 역시 선수들의 판단에 맡겼다.

이 때문일까. 모 구단의 전력분석원은
“하위권 몇 팀의 작전은 벤치의 특성만 파악하면 쉽게 예상할 수 있지만 SK와 두산의 작전은 선수가 주체가 되기 때문에 예상이 어렵다”고 털어놨다.
이 전력분석원은 대화 말미에 두산 선수들의 주루를 가리켜 “영리한 질주”라고 표현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두산 선수들은 홈이라는 목표를 향해 트랙을 질주하는 스프린터 같다. 단순히 한 베이스 더 가는 게 아니라 언제든 홈으로 뛰어들 기세다.
따라서 상대팀 수비수들은 더 긴장하고 위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두산 선수들의 주루플레이가 단순히 힘과 주력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기술적 완성도가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짧은 외야플라이 때 3루 주자 이종욱이 태그업에 성공한 건 최형우의 어설픈 포구자세를 정확히 꿰뚫은 이종욱의 눈에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포인트는 6회말 이대수의 3루타였다.
이대수가 2루에 다다를 즈음 고갤 돌려 우익수 최형우의 상태를 파악한 뒤 바로 3루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과거 이대수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주루였다.”

두산의 주루가 단순히 ‘두려움 없이’ 뛰는 차원을 넘어 ‘생각하며’ 뛴다는 뜻이다.

너의 내일을 위해서라면 나의 오늘은 없다

두산 김경문 감독은 베이징올림픽 금메달과는 별개로 재조명을 받아야 하는 감독이다. 어쩌면 올시즌 프로야구의 흥행은 8개 구단 감독들의 색깔이 제각기 달랐기 때문인지 모른다. 물론 색깔은 무게를 잴 수 없고 우열을 논하기에도 부적절하다(사진=두산)

삼성과 두산의 플레이오프가 시작되기 전 이용철 KBS 해설위원은
“롯데와 두산은 엄연히 다른 팀”이라며  그 가운데 “주루능력에 큰 차이가 있으므로 삼성의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같은 ‘No Fear(두려움 없이)’인데도 두 팀 주루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산은 2004년 이래 꾸준히 팀 칼라를 다져온 만큼
‘두려움 없는’플레이의 세련미와 숙성도가 올시즌부터 새로운 팀 칼라를 다지기 시작한 롯데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높다.

여기다 롯데가 전해까지 유지해온 수동적인 야구와 결별하기 위해 “결과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말로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면
두산은 선수들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데 ‘두려움 없는’야구를 강조했다. 이는 중요한 문제다.

김 감독은 건전한 주전 경쟁을 통해 선수들의 가능성을 실력으로 극대화하는데 남다른 재주를 갖고 있다.
 이대수와 김재호는 시즌 내내 주전경쟁을 펼쳐야 했고 2익수 고영민이라도 조금만 방심하면 자리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이때마다 김 감독은 “플레이의 적극성과 결과에 따라 주전을 보장하겠다”는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이는 “결과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차원을 넘어 “과정과 결과를 검토해 그에 따른 확실한 보상하겠다”는 적극적인 독려였다.

수도권 어느 팀의 노장선수는 “‘네가 실패해도 2군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말만 들어도 선수들에겐 큰 힘이 된다.
여기다 감독이 ‘네가 잘하면 언제든 주전으로 중용하겠다’고 약속하면 그만큼 효과적인 자극제도 없다”며
“두산 코칭스태프는 그 약속을 지켰기에 선수들의 분발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두산 선수들의 주루플레이가 적극적일뿐더러 세련되기까지 한 이유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야구계의 오래된 격언 가운데 ‘실수를 범한 선수에겐 내일이 있지만 실수를 범한 지도자에겐 내일은 없다’가 있다.
야구감독들이 신인보단 노장선수를 선호하고 파격적인 시도보다 안정적인 플레이를 선호하는 것도 자칫 ‘모험’은 ‘모함’으로, ‘실험’은 ‘실패’로 비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산 김경문 감독은 선수들의 실수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두산의 ‘두려움 없는’ 야구는 선수들의 미래를 자신의 오늘보다 중시했던 김 감독의 리더십에서 기인했는지 모른다.
다른 7개 구단 감독도 예외는 아닐테지만 이 순간만은 김 감독에게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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