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이었다. 일본 프로야구를 취재할 때다. 도쿄에서 주니치 드래건스 담당 기자를 만났다. 그는 오른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올 시즌을 끝으로 주니치가 오치아이 히로미쓰 감독을 자를 것 같다”고 했다.

감독 목숨이 파리 목숨인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명분이 중요하다. 자를 때 자르더라도 명분이 있어야 뒤끝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주니치는 명분이 부족했다. 7년 동안 오치아이 감독은 팀을 센트럴리그 3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양대리그인 일본 프로야구는 일본시리즈보다 리그 우승을 더 높이 평가한다. 중요한 건 당시 주니치가 센트럴리그 2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주 : 주니치는 결국 시즌 내내 1위를 달리던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제치고 또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명분에만 연연하기엔 오치아이 감독의 폐해가 너무 컸다.” 주니치 담당기자는 열 손가락을 접으면서 차례차례 오치아이 감독의 실정을 열거했다. 듣고 보니 수긍할 만한 내용이었다.

사실 오치아이 감독은 일본 야구계에서 자기밖에 모르는 지도자로 유명하다. 선수들의 기록은 안중에도 없다. 퍼팩트 게임을 펼치던 선수를 9회에 내리고, 팬들이 환호하는 베테랑을 벤치에 앉히기 일쑤다. 조금이라도 감독의 권위에 도전하면 가차없이 2군행을 지시한다. 한번 눈 밖에 나면 1군 복귀는 꿈도 꿀 수 없다. 프런트와의 관계도 좋지 않아 늘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하지만, 오치아이 감독은 초보 감독 때보다 그랬다. 주니치가 모를 리 없었다. 진작 해임 카드를 들었어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어째서 주니치는 올 시즌에서야 오치아이 감독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일까.

“올 시즌이 3년 재계약이 끝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오치아이 감독이 싫다고 정해진 계약 기간 중에 해임할 순 없지 않은가.” 주니치 담당기자는 당연한 질문을 한다는 듯 기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따지고 보면 오치아이 감독뿐만이 아니다. 일본 프로야구단은 대개 감독과의 재계약이 끝나는 시점에 결별 카드를 집어든다. 아무리 성적이 좋지 않아도 계약기간이 남아있는 감독을 경질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물론 제 발로 나갈 땐 예외다. 이유는 간명하다.

계약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약기간을 보장하지 않으면 감독이 장기적 안목으로 팀을 운영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해태 김응룡 전 감독이 “계약기간이 보장된 감독은 내일을 보지만, 언제 잘릴지 모르는 감독은 오늘만 집중한다”고 말한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근래 한국 야구계는 그런 것 같지 않다. 구단이 보기에 감독과의 계약서는 휴짓조각에 불과한 듯싶다. 그도 그럴 게 지난해 연말부터 올 시즌까지 6개 팀의 감독이 바뀌었지만, 이 가운데 감독이 계약기간을 다 채우고 떠난 팀은 롯데뿐이었다. 여기다 제 발로 나간 감독은 두산이 전부였다. 나머지 팀 감독들은 하나같이 계약기간을 남긴 상태에서 타의에 의해 팀을 떠나야 했다.

앞서 말했듯 ‘감독 목숨이 파리 목숨’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다. 모 단장은 자기 팀 감독을 경질하고서 “감독 운명이 다 그런 게 아니냐”며 별일이 아니다라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고, 그것이 별일 아닌 일이라면 구단들에 묻고 싶다. 뭐하러 감독과 계약서를 쓰고, 계약기간을 발표하느냐는 것이다.

삼성은 선동열 감독과 재계약하면서 ‘5년 계약’이란 파격안을 내놨다. LG도 박종훈 감독을 영입하며 겉으론 ‘5년 계약’을 제시했다. 당시 두 구단은 “장기적 안목으로 팀을 만들려면 최소 3년 이상의 감독 계약기간은 보장해줘야 한다”는 말로 장기계약의 배경을 설명했다. 야구계가 고개를 끄덕인 건 두 구단이 밝힌 이유가 나름 합당했기 때문이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장기적 안목으로 팀을 만들겠다는데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많은 야구인이 “계약 마지막 해만 되면 감독들이 자신의 재계약을 위해 선수들을 혹사해 왔다. 장기계약은 이러한 폐단을 없애는데 특효약이 될 것”이라고 평한 것도 장기계약의 장점이 컸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삼성과 LG는 툭하면 감독을 바꾸던 구단들이었다.

하지만, ‘장기적 안목’운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선 감독은 재임기간을 4년이나 남겨둔 상황에서 잘렸고, 박 감독은 2년만 채우고 도중하차했다. ‘감독 목숨이 파리 목숨이 아니다’라는 걸 보여주겠다던 두 팀이 정작 보여준 건 ‘계약기간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최근 KIA 감독이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낙마했다. 감독 계약서가 다시 한번 휴짓조각이 된 순간이었다. 덧붙여 팀을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과 올 시즌 포스트 시즌 진출로 이끌었던 KIA 조범현 감독의 경질은 ‘우승 아니면 해임’이라는 철 지난 구시대의 악습이 다시 전면에 등장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마지막으로 감독들의 ‘선수 쥐어짜기’가 다시 유행할 것이란 걸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했다. 약속된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데 어느 감독이 선수들의 건강과 미래를 신경 쓰겠는가.

이렇듯 계약기간이 아무 의미가 없다면 앞으로 구단은 감독과 계약할 때 정식 계약서가 아닌 가계약서를 쓰는 게 옳다. 지키지도 못할 ‘장기적 안목’, ‘감독에게 전권을 주겠다’는 말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게 상도덕에 맞고, 팀과 선수단을 위해서도 좋다. 특히나 구단에 좋다.

감독이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면 남은 기간의 연봉은 고스란히 구단 지갑에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팀을 위해 일하지 않는 전임 감독에게 수억 원의 연봉을 지급해야 한다는 건 구단 입장에선 큰 손실이다. 구단의 운영비가 대부분 모그룹에서 나온다 치면 이는 모그룹의 손실로 직결된다.

한 가지 더. 신임 감독 선임의 변으로 ‘지역 출신’ 강조는 지양했으면 한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프로야구는 ‘내 고향 출신’, ‘내 지역 사람’을 감독에 앉히는 게 유행이 됐다. 연고지를 바탕으로 한 프로야구에서 ‘지역 출신’은 중요하다. 지역 출신 감독에게 더 애정이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출신 지역보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의 능력과 기대치다. 프로야구 30년사를 되돌아봐도 '내 지역 출신 감독' 때문에 관중이 증가한 경우는 드물다. 그보단 성적이 우선이다. 무엇보다 시장이 좁은 국내 프로야구 실정상 구단들은 전국구 구단을 지향해야 한다. 자칫 '지역 출신'을 강조하다간 지역구단으로 매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감독을 경질하면서 ‘자진 사퇴’라는 말은 남발하지 않았으면 한다.

조 감독은 경질되기 이틀 전까지 내년 시즌을 구상했다. 그러던 이가 이틀 새 갑자기 자진사퇴를 결심했다면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다. 지난해 삼성도 그랬다. 구단은 선 감독의 경질을 ‘용퇴’라고 포장했다. 올해 LG도 박종훈 감독의 경질을 ‘자진 사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진 사퇴’라는 말로 감독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비겁한 태도보단 더 세련된 입장 표명을 하는 게 세계 초일류 기업을 모그룹으로 둔 구단이 마땅히 취해할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