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도종환 시인의 유명한 시 한 글귀다. 

그들은 꽃 같다. 마운드에 피는 꽃.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바람에 흔들리고, 뜨거운 햇살을 머금으면서 피어난다. 꽃처럼 화려하지만, 화려한 만큼 사람들의 욕심이 아프게 꽃잎을 스치우기도 한다. 많은 선수가 꽃처럼 피어나고 지는 곳에 살고 있다. 그들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왔다. 그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가슴에 꼭 박히는 것들이 있다. 

 

“어떤 책에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사람은 저마다 피는 시기가 정해져 있대요. 은은하게 피는 꽃도 있고 벚꽃처럼 확 피었다가 지는 꽃도 있고. 자기만의 시기가 있으니까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면 활짝 필 수 있다는 거죠. 꽃이 피려면 항상 기다리고 준비해야 하잖아요. 인내심을 가지고.”

곽시인, KIA 투수 곽정철의 이야기였다. 

2014년 2월. “떨린다. 아 이제 시작이구나하는 생각에 비행기에 오르면 울컥할 것 같다”며 괌캠프로 떠났던 그를 다시 만난 곳은 함평 챌린저스필드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떠났던 캠프였지만 그는 이내 퉁퉁 부은 무릎을 안고 돌아와야 했다. 9번의 수술로 지칠 대로 지쳤을 곽정철은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생각보다는 밝은 표정으로 속내를 털어놓던 그는 자신은 아직 피지 못한 꽃이라고 말했었다. 

 

 

“공동묘지에 가서 손가락이고 팔이고 다 가져오고 싶어요.” 

 

누구보다 화려한 꽃이었던 KIA 투수 한기주의 한탄이 아프게 다가왔던 날이 있었다. 계속된 부상으로 무척이나 힘들어하던 한기주. 한기주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프로야구를 대표할 꽃 중 하나였다.그러나 10억팔이라는 이름은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기능을 잃어버린 팔꿈치 인대를 바꾸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손가락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손가락을 수술대에 올려 놓아야했을 때는 다시는 공을 던질 수도 없다는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 두려움이 끝이 아니었다. 손가락과 손바닥 사이를 길게 갈라놓은 상처를 보여주면서 영광의 상처라고 웃던 한기주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한참 연락이 되지 않던 한기주는 어깨 수술을 한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게 한기주의 시계가 멈췄다.

 

 

 

이날 재활조 선수들의 오후 훈련은 산책이었다. 함평 챌린저스 필드 주변을 빙 둘러 걷기 위해 채비를 하던 그들을 따라 나도 경기장을 나섰다. 어렵지 않은 코스라는 이야기에 발로 뛰는 취재를 자처했지만 한참을 걷고 걸어야 했던 길. 잠시 쉬어가는 시간에 곽정철이 길가에 있던 꽃을 꺾어 한기주의 머리에 얹었다. 카메라 앞에서 그들은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반복되는 일상, 지겨운 일상보다 더 힘든 것은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지겨움과 두려움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던 이들의 웃음에 괜히 내가 더 힘이 났던 날이다.

 

자세히 보면 슬픈 사진이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모두 1차로 KIA 유니폼을 입은 투수들이었다. 박지훈을 놓고 잠시 격론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당시 우선지명이 없었다면서 ‘1라(운드)들’로 결론을 냈다. 이들은 1라들이 여기에서 모두 재활을 하고 있다며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웃음을 지었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면 많은 꽃이 피어난다. 유독 눈길을 끄는 꽃에는 관심이 쏟아지고 손길이 가게 마련이다. 아직 필 때가 아닌데 성급한 마음에 꽃망울을 먼저 터트리는 꽃도 있다. 새로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시선을 뺏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꽃도 있다. 숙명처럼, 잘 몰라서,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부상을 입고 꽃이 일찍 꺾이기도 한다. 

 

곽정철의 꽃이 조금 일찍 피었다. 그래서 잠시 숨을 고르며 햇살을 기다리고 있다. 울컥울컥 1군에 합류하고, 시범경기를 치르고, 개막전 엔트리에 들었고, 1792일 만에 세이브도 했다. 그러나 그의 봄이 완전히 오지 않았다. 묵직하게 너클 커브를 누르던 그의 오른쪽 세 번째 손가락이 겨울처럼 차다. 혈행장애로 다시 재활군이 되어야 했던 곽정철. 어떻게든 공을 움켜쥐기 위해 그는 바늘로 쿡쿡 자신의 손가락을 찌르기도 했다. 괜찮다고 웃고는 있지만 사실 하늘이 원망스럽기는 하다. 

 

“잘 지내고 있어요. 열심히 사우나도 하고. 좋아질 거예요. 다시 마운드에 돌아가면 하늘 한번 쳐다보려고요. 너무 하지 않느냐면서 하늘 한번 노려보려고요(웃음).” 

 

 

1401일 만의 세이브, 1462일 만의 승리투수, 1668일 만의 선발승. 악몽 같던 시간이 만든 기록 앞에서 한기주는 담담하다. 오랜 시간, 힘들게 야구를 붙잡고 있던 예전의 모습과 달리 그는 요즘 평온하다. 내려놓았다. 욕심을 내려놓았고, 미련을 내려놓았다. 4년 만에 스프링 캠프를 치렀던 한기주는 캠프에 앞서 비장하지만 다른 이의 이야기를 하듯 무심하게 “이번에도 아프면 그만 해야지. 더 이상 할 자신이 없다” 는 말을 했었다. 

 

“기록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있어요. 내가 10승을 바라겠어요. 그것보다는 주어진 자리에서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프다는 생각은 내려놓았어요. 마음 편하게 아프면 그만둬야지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머릿속에서 아픈 것을 그냥 다 지웠어요. 스피드도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아요. 언제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고. 맞춰 잡는 피칭으로 경기를 풀어가고 있고, 그렇게 해야해요.” 

 

‘인간 승리’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한기주다. 아직은 아니다. 더 해봐야 하는 것이다. 끝까지 버텨야 승리다. 이 잠깐으로는 인간 승리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게 한기주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의 목표는 풀타임이다. 

 

두산을 상대로 두 번째 선발 등판을 앞두고 있는 한기주. 사실 가까이에서 한기주를 오랜 시간 지켜봤지만 오늘의 모습을 기대하지는 못했다. 손가락, 팔꿈치, 어깨... 공을 던지는 동작에 필요한 부분을 모두 수술을 했던 터라 ‘과연’이라는 시선으로 안타깝게 기다렸던 것 같다. 두산전을 앞두니 한기주의 각별한 친구 김현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기주가 주최하는 자선 일일호프에 함께 해주던 김현수. 두 친구는 만나면 늘 티격태격이었다. 한기주는 “다음에 만나면 빈볼을 던지겠다”고 친구에게 으름장을 놓았고, 김현수는 “일단 타석에서 얼굴이나 보자. 야구나 하면서 이야기하라”고 응수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 김현수는 “정말 쟤는 던진다고 하면 던질 놈이에요. 손가락도 길고 무섭다니까요”라며 이르듯 한 마디를 더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어려울 것이라고 고개를 저을 때에도 친구 김현수는 낙관적이었다. “한기주가 다시 마운드에서 공을 던질 수 있을까?”라고 김현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김현수는 무조건 돌아온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유는 “한기주니까”였다. 일단 경기장에서 만나고 보자던 두 사람의 대결은 볼 수 없게 됐지만 꿈을 이룬 그들을 보게 된 2016시즌이다. 

 

아직 갈 길이 멀고, 결말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곽정철, 한기주가 마운드에 돌아와서 다시 공을 던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KIA팬들에게는 고맙고 가슴 뭉클한 시간이다. 더 이상 아픈 손가락이 없으면 좋겠다. 흔들리지 않고 꽃들이 피어나면 좋겠다. 

 

 

에필로그.

 

고향으로 돌아온 날 김병현은 “예전 그 공 한번 던지고 마운드를 떠나고 싶다”고 그랬다. 뒤를 돌아보면 김병현은 화려했던, 화려해야 했던 시절이 아리다. 

 

“후배들에게 아프면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하라고 한다. 미국에 있을 때 부상 관리를 잘 못했던 게 가장 후회된다. 당시에는 언론도 내게 우호적이지 않았고 낯선 곳에서 기다릴 시간도, 천천히 하라고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무시당하지 않고 내 야구를 하기 위해서는 보여줘야 했다. 그리고 아픈 데 공을 던지다 보면 또 던져졌다. 어 괜찮네라고 생각하면서 무리를 했었다. 그게 가장 후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