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유럽 2006] 제 42탄. 바르셀로나 : 바르셀로나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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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유럽에서 한국배낭족을 이렇게 많이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원래 돈이 많아 해외여행을 자주 즐기는 일본인이나, 돈은 별로 없어도 일단 쪽수가 많으니 유럽에 온 사람도 많은 중국인에 비해 절대적인 숫자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모두들 런던, 빠리, 베네치아, 프라하 같은 뻔한 도시들만 집중적으로 다니시다 보니 유명한 관광지에는 사람이 몰리는 경향이 다분하다. 이와는 반대로, 유명한 관광지에서 약간만 벗어나도 한국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여하튼 그리하여, 7,8월의 프라하 까를교에서는 "안녕하세요. 한국사람이시죠?"하는 일종의 확인절차도 필요 없이 "저기 죄송하지만 사진 찍는데 좀 비켜주시겠어요?"라는 말들이 인사도 없이 초면에 오고 가는 희한한 풍경들을 볼 수 있다. 굳이 까를교의 예를 들지 않아도, 온 세상을 떠도는 다양한 국적의 배낭족들 중, 한국배낭족들만큼 서로 인사를 하지 않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다른 나라의 배낭족들은.. 특히 이탈리아인들끼리는 언제나 "챠오~ 리딸리아노~" 하며 어디서든 서로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하는 보기 좋은 모습들이 보이는데, 오죽하면 어딘가에서는 '한국 사람들끼리 인사 좀 하고 다닙시다!' 하는 캠페인까지 벌어지고 있는 지경이겠는가.  좁은 국토에서 매일 같이 같은 얼굴들이랑 부대끼는 환경에서 살던 우리가 인사에 인색한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인심이 야박한 민족은 결코 아니다. 일단 누군가가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꺼내고 나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이다. -어머 한국분이세요. 몰랐어요. -우리 로마에서 본 것 같은데 그 때 혹시 검은나시 입고 있지 않았나요. -맞구나. 그렇구나. 반가워요. -예 혼자서 다니고 있어요. -아직 일정 많이 남으셨구나.. 좋겠다 난 4일 있다 아웃인데..-숙소는 어디세요. -어머 우리도 거기에 가려고 했다가 그냥 다른 호스텔 잡았는데 -저희는 이제 람블라스로 가려고 하는데 혹시 같이 가시지 않겠어요? 다시 말해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는, 함께 하자는 뜻, 일행이 되자는 의사 표시의 시작이다. 서양 친구들 처럼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가 처음 마주칠 때 인사를 나누기 꺼려하는 것은 그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그 날은, 혼자 외롭게 다니며 지지리 궁상을 떨기로 한 날이었다. 혼자 거리를 배회하며 사진을 찍고 사색에 잠기고 일기를 정리하고 친구들에게 엽서를 쓰면서, 혼자만의 자유를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구엘공원 뒷문을 통해 내리막길을 점점 내려오던 나를, 저 멀찍이서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빤히 쳐다보고 있다. 생긴걸로나, 옷입은걸로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폼을 보나, 저 사람들이 한국인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 상의를 입고 있는 내가 한국인으로 보일 것 또한 분명했다. 갈등스럽다. 여기서 "안녕하세요."를 해버리면 오늘은 꼼짝 없이 저 사람들과 함께 다녀야 한다. 정말이지 오늘은 혼자서 다니고 싶은데... 사람들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벌써 눈이 마주쳤다가, 어색한듯 외면했다가를 수 차례.. 눈을 질끈 감고 못 본척 해 버리기만 하면 되는데... 이대로 지나치면 되는데.. 지나치면 되는데.. 그러다 마지막으로, 아까부터 줄곳 신경쓰이던 맨 오른쪽 한명과 또 다시 눈이 마주친다. 새하얀 종아리에 가느다란 팔뚝, 동그랗고 새카만 눈동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끝끝내 참지 못한 말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터져 나온다.  "안녕하세요." 아.. 이런... '한국분이세요.. 얼마나 다니셨어요.. 숙소는 어디예요.. 어디로 가실건가요..'가 이어지다가.. 마무리로 큰거 한 방먹는다. "혼자서 너무 외로우셨겠다... 오빠도 저희랑 같이 다녀요." 어찌할 방도가 없다. 내겐 여동생이 없는데, 그런데 오빠랜다. 같이 가잰다. 오빠랜다. 나보고 오빠랜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혼자 다니고 싶어서요."라고 말할 용기도, 의지도 눈 녹듯 스르륵 사라져간다. 그러고 보니 한달이 넘도록 여지껏 남들 다 한 번 씩 겪고 돌아온다는 로맨스 한건 잡지 못했다. 사색이고 일기고 엽서고.. 동화에서 튀어나온듯한 아가씨가 손목 잡아 끄는데 고민할 이유가 없다. 우리를 위해 이런 곳에다 공원을 꾸며준 구엘과 가우디에게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감사를 표해야겠다. 더 이상 끌 것도 없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이 하얀종아리 일당들과 함께 하기로 한다.     군중심리에 젖어 2주 뒤에 지워진다는 가짜문신 헤나도 큼직하게 그려주고. 람블라스 거리에서 와인잔 기울이며 사람 구경, 옷 구경, 플라멩코 구경. 이놈의 도시는 볼거리가 많으니 같이 다닐 곳도 많다. 남중,남고 나온 비극을 이제서야 보상 받는구나 싶다. 구엘의 또 다른 역작, 까사바뜨요와 까사밀라.   풍랑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범선이 막 보이려 한다. 다시 한번, 가우디는 천재 맞다. 세상에나 바다로 집을 지어놓다니.  람블라스 거리의 과일시장을 구경하다가, 옆으로 맨 가방 지퍼가 지이익 하고 열리는 느낌이 전해져온다. 순간적으로 몸을 휙 돌리니, 왠 키만 멀대 같이 크고 비쩍 마른 아랍친구 한 녀석이 인파들 사이로 황급히 사라져간다. 말로만 듣던 소매치기다. 녀석은 정확히 5초 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하면서도 얼굴 표정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나와 눈이 마주친다. 훗날의 무용담을 위해서라면, 샤방샤방한 한국 아가씨들 앞에서 고함을 버럭 지르며 뛰쳐나가 자신의 용맹스러움을 과시 하는 수컷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엔 시장바닥에 사람들도 너무 많고, 사실은 제대로 된 타이밍도 놓쳐 버렸다.    형이 사실은 태권도가 2단이란다. 물론 지금은 다 까 먹었지만 금강도 아니고 무려 태백까지 품세를 배웠었는데 무사히 돌아가다니 너 오늘 재수가 무진장 좋다.  다시, 어쩔 수 없이 나를 이 패거리에 끌어들인 하얀 종아리 아가씨와의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온갖 분위기 좋은 고성에, 궁전에, 정원에, 교회가 넘쳐나는 이 유럽에서 젊은 남녀가 눈 맞는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분위기 좋은 구경거리들이 온 대륙에 두서 없이 널려있고 또 다들 예쁘게 계획한 제각각의 일정이 있어서 기껏 눈 맞은 남녀가 작별할 시간도 금방 찾아온다는 점이다.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꼭 만나자는 약속은 당연히 몇번 씩이나 했다. 자기네 민박집으로 숙소를 옮기라는 말도 여러번 들었고, 급기야 루트 까짓게 뭐가 중요하냐고 같이 빌바오, 보르도를 거쳐 빠리로 가자는 제안까지 들었다. 빠리는 애저녁에 갔었는데, 게이도 만나고 세느강 유람선도 타면서 이미 뽕을 뽑았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이 마땅하나 또 한편으로는 솔깃하다. 내 유레일패스 기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어떻게든 마지막에 로마로 가서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만 하면 되는거니까. 베르사유와 라데팡스를 가보지 못해서 후회가 된다는 구차한 자기합리화와 함께. 우물쭈물 망설이는 내게 하얀 종아리는,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내일 아침 아홉시까지 산츠역으로 나오면 된다는 말로 마지막까지 나를 공황에 빠뜨린다. 숙소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그렇게 성격 싹싹하고 말 잘 통하고 얼굴 까지 예쁜 동행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으려고. "또 만나요." 하던 목소리가 귓가에서 앵앵 맴돌더니 기어이 꿈을 꾸고야 만다. "야 근데 이렇게 삼겹살에 소주 마시면서 너 다시 보니까, 유럽에서 샹그릴라 마시면서 볼때랑은 좀 다른거 같어. 어째 그 때 보다 살 찐거 같다?"라는 나의 자뻑에, "술 먹고 나서 하는 말이지만 나도 솔직히 오빠가 그 때는 그렇게 멋있어 보였는데.." 라는 하얀 종아리의 응수. 예지몽일까 아니면 개꿈일까. 여행중의 전혀 뜻하지 않은 로망스는 여기까지.  배낭족은 배낭에 충실해야 한다. 나는 이튼날 새벽 일찍, 미리 예매해 둔 저가 항공편으로 세비야로 날아버렸다. 당장 내일부터 땅을 치고 후회 하겠지만, 10년 뒤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이 길을 택해야 한다. 흠... 아디오스... 세뇨리따 까딸루냐.. 하얀 종아리 하나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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