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지배자가 국민들을 장악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웅장한 조형물을 세워 권위를 보여주는 것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금까지도 아주 많이 쓰이고 있는 방법이다.


아프리카에서 부터 바다를 건너온 이슬람 세력들은 세비야와 꼬르도바,
그라나다 같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을 점령하여 유럽속의 이슬람문화라는
생각지도 못한 유산들을 남겼다.



이슬람세력을 몰아낸 기독교도들이라고 다를소냐.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이슬람 사원을 깡그리 무너뜨리고는,
그 자리에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 런던의 세인트폴을 잇는 유럽에서 세번째로 큰 대성당을 지어버렸다.










단순히 예배당 하나만 있는게 아니라 방들이 여러개로 나뉘어져 있어 성당치고는 구조가 복잡하다.
아직까지 로마를 가지 않았고 런던에서는 8파운드나 되는 입장료가 아까워서
세인트폴을 들어가보지 못한 나는 인생에서 가장 큰 성당을 맞아 방향감각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고,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마드리드에서 줄곳 아버지의 사업을 돕느라 바빴다는 희재는
한술 더 떠서, 높은 천장을 올려다 보며 그저 '어유.. 어유..'라는 탄식만 내 뿜고있다.








중현 : 원래 이렇게 성당 크게 짓는게 신자들 기죽여서 꼼짝 없이 무릎 꿇게 만드는거잖아.
너 교회 다닌다며? 이런거 보면 기도 안해? 빨리 기도 해.
교회나 성당이나 어차피 같은 예수님인데 호환 안되냐?


희재 : 성당 가도 크게 상관은 없는데 쪽팔리게 이런데서 무슨 기도야..
교회도 일년중에 부활절 하루만 나가는 판인데..


중현 : 이 새끼 완전 나일론인데? 야 그럼 크리스마스엔 교회 안가냐?


희재 : 그 때는 여자친구 만나서 놀아야지 교회는 무슨.. 가서 사진이나 찍어..









그리스교도들이 이슬람 사원을 그렇게 무너뜨릴, 예배시간을 알리던 첨탑으로 이용되던 히랄다탑만은
외관이 워낙 아름다웠던지라 차마 손대지 못하고 남겨서 종탑으로 쓰고 있단다.
꼭대기까지 힘들게 걸어 올라가서 내려다본 세비야 투우장이 보인다.





15세기경 대항해시대에는, 세비야는 서쪽 항로개척을 위한 시발점이었다.
신대륙에서 빼앗아온 모든 황금과 인디오 노예들이 독점 무역항이던 이 곳 세비야를 거쳐 갔었고
콜럼부스의 서인도 탐사와 마젤란의 세계일주의 시작점도 세비야였다.
그리고 보니 콜럼부스의 유해가 안장되어있는곳도 여기 세비야의 대성당이다.








철창으로 둘러싸인 저 벽은 아즈텍과 잉카, 마야에서 착취해온 1.5톤의 황금으로 만든 황금벽이다.
지금은 자신네들의 언어도 거의 완전히 잃어버린 인디오들의 눈물로 만든 황금벽을,
가까이서 카메라에 담으려는 나를 제지하는건 스페인 관리인이다.

'노뽀또' 좋아하시네. '노착취'다 이 아름다운 새끼들아...







대성당의 황금의 벽과 런던 대영박물관의 파르테논신전 조각들,
그리고 빼앗긴 우리의 문화유산 74434점이 묘하게 겹쳐 찝찝해진 기분은,
국제학생증ISIC가 있으면 7유로나 되는 알카사르의 입장료가
무료라는 안내판을 보고 금방 풀리게 된다.
정말이지 배낭족은 단순하다. 극도로 단순하다.





























'유럽'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중세의 석조로 된 예쁜 궁전과 교회와 성곽들 사이에서
흰 말을 탄 기사와 빨갛고 노란 꽃을 든 공주가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신밧드나 알라딘 알리바바가 나올만한 곳이
유럽에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기란 참 힘든 일이다.







유럽에 다시 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하기가 어렵지만,
이슬람문화권의 보고인 중동지방을 여행할 기회는 정말 드물것 같다.
7월말의 남부 스페인의 태양은 심장까지 다 태워 먹을 기세지만,
내가 언제 이런거 보랴..하는 생각이 다리에 힘을 불어 넣어준다.















알카사르의 정원으로 내려간 순간,
나는 잠깐 동안 나 자신을 잃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제 갓 군생활을 끝내고 유럽으로 날아와서 얼추 30일째 여행중이고,
돌아가게 되면 대학으로 복학할 예정인 그 한국인이 아니었다.









알카사르 정원을 거니는 그 순간, 나는, 이슬람교도들을 정벌한 이후로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고는
스페인 전역에서 이슬람 장인들을 불러다 호화로운 궁전을 세운
카스티야 왕국의 '잔인왕' 페드로 1세가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든 남의 나라든 그간 왕들이 살던 궁전은 뻔질나게 다 돌아다녀 봤다.
경복궁 교태전을 보고 '저기가 내 여자친구네 집이야.'라며
친구들에게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진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나 내가 왕인지, 왕이 나인지 모를 호접스러운 기분을 느낀적은 또 처음이다.





알카사르에는 그런 마력이 있다.

'신혼여행지로 제격이야..'라는 생각과 함께 아직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하얀종아리를 떠올리며
옆을 돌아보는순간, 내 호접지몽은 박살이 나버린다.



















이런 곳에서 하필 함께 있는 것이 수염이 덥수룩한 군시절 동기라니...
카스티야 왕은 개뿔.. 이슬람 노예가 된 기분이다.




뭐, 피차 위로 받을 곳 없는 영혼인 우리는 '미안해 하필이면 지금 나랑 같이 있어서..'
라며 서로에게 진지하게 사과를 하는 촌극을 벌인다.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느끼는 감정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인 경우가 있다.
동행인이 있으면 여행지에 대한 감흥이라거나 자신의 경험과 생각뿐만 아니라,
이렇듯 시선의 차이까지 공유할 수 있다.
분명 서로 마주 앉은 자세에서 같은 카메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찍었는데도,
이렇게나 다른 사진이 나온다.











저기. 잠시만요. 영어 하실 줄 아세요?

예. 저는 한국에서 온 사진을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제가 당신 사진 좀 찍어도 괜찮을까요? 당신 모습이 꼭.. 무슬림 공주 같아서요.

예. 거기서 그 난간에 손을 대고 이쪽을 돌아보시면 되요.

굿!! 완벽해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희재 말에 따르면 '무슬림 공주'라는 기지에 꾼으로서의 기질이 슬쩍 옅보였다던데,
정말로 조금은 그렇게 보였다.
여하튼 공주 같다는데 싫어할 여자가 있으랴.
여행 후반부에 접어들게 되니 들이대는데도 이골이 났다.
이국의 쭉쭉 빵빵들이여, 어서 내 카메라에 담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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