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가의 레스토랑에서 파는 따빠스는 지나칠 정도로 입에 잘 맞았고,

레몬과 얼음을 둥둥띄운 샹그릴라는 무제한 리필이었다. 또 과음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럽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목이 텁텁하다.

샹그릴라를 나보다 한 대야씩이나 더 마셔대던 희재놈은 멀쩡한데 나는 왜 이럴까.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내 주량은 고작 이 정도일까.

이런 숙취에는 그저 학교 앞에서 파는 3500원짜리 선지해장국이 최고다.

얼큰한 국물에 부득부득 씹히는 선지가 자꾸만 아른거리지만, 이런 곳에 선지국 같은게 있을리 없다.







예전에 아침마다 통화하곤 하던 캐나다 출신 전화영어선생님은,

전날 밤에 술을 많이 마셔서 머리가 아프다는 내게 그럴 때는 커피를 한잔 마시면 된다고

무슨 대단한 생활의 경험이라도 전수해 주는 양 이야기 해 주는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샘, 선지국이라고 혹시 알아요? 콩나물국은요? 여명808은 당연히 모르죠? 어허 이 아저씨 술 먹을 줄 모르네?’

하는 말이 목구멍 바로 밑에까지 치밀어 올라왔지만,

영어가 딸려서 결국 말하지 못했었다.





아무래도 폭음하는 술자리 문화가 찬란히 꽃핀 우리 대한민국은

해장산업 또한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일 게 틀림 없다.















여하간 숙취 때문에 별로 좋지 않은 기분인 채로 그라나다역에서 내려,

론리에 나온 적당한 가격대의 숙소에 전화를 건다.

“헬로? 에.. 아임 루킹 포 원 더블룸 포 투나잇. 위치 헤즈 세퍼레이티드 배드. 이즈잇 어베일러블?”

수화기 저편에서는 여지 없이 ‘올라꼴라꾸에노리따…’하는 스페인어가 들려온다.









참 신기한 것이, 상대편은 스페인어로만 떠들어대고 나는 영어만 주워 섬기고 있지만,

영어와 스페인어는 비슷한 부분이 조금은 있어서 숙소 예약이나 음식 주문 같은 생존형 대화는 가까스로 의미가 통한다.

물론, 피차 두번 세번씩몇번이고 이야기를 반복하며, 대화에 온 정성을 다 쓴다는 한다는 전재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의 일이다.







하지만 날씨는 더웠고 지금 나는 숙취와 갈증, 그리고 피로에 지친 상태다.

부엌을 사용할 수 있냐는 내 물음을 알아 듣는지 못 알아 듣는지 “씨.. 씨..”하고 긍정만 하는

아주머니 목소리를 듣자니 가슴 쪽에서 뭔가가 확 올라온다.

“나 참 그냥 가서 보죠. 아님 영어로 하든가!! 진짜 장사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니면서!!”라고

한국말로 짜증을 확 내버리고는 수화기를 내팽겨쳐 버린다.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푹푹 내쉬는 내게, 희재가 가만히 어깨를 주물러 주면서 다독인다.

“그래도 그 사람들, 영어를 어떻게든 알아들은 순 있으니까 막 대화 해 보려고 시도 하는거잖아..

스페인에서 스페인어 하는게 걔네 한테는 당연한건데,

니가 짜증난다고 같이 한국말 해 버리면 서로 아무것도 안 되잖아…

넌 항상 숙소 구할 때는 되게 민감하더라..”







일리가 있다. 내게도 문제가 있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는, 출발 전에 A4용지에 빽빽하게 정리해온 여행용 회화를 보면서

‘익스꾸제무아, 씰부뿔레? 빠흘레 부 장글레? 그라찌에.’하고 되는대로라도

그 나라 말들을 주워 섬기려고 노력했었지만,

이곳 스페인 남부에서는 영어가 잘 통하지도 않는데도, 정리 해 온 회화 집을 도통 꺼낸 적이 없다.

희재와 함께 다니면서 긴장도 풀리게 되었고

약간 저렴한 물가덕에 돈도 좀 덜 아끼다 보니

내가 어디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든 탓이었나보다.







주의할 일이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모습을 배우러 왔지 안하무인으로 돈 써지르는 맛을 느끼러 온 것은 아니지 않나.

아무리 독재정권 치하에서 망하다만 나라라지만 스페인은 여전히 우리보다 국민소득도 높고,

배울 것도 많은 나라다. 여자들도 예쁘고 축구도 잘한다.

이들에게 뭔가를 배우려면 언어라는 아주 원초적인 부분에서부터

이 사람의 삶을 이해해나가야 한다.

이해하자. 이해하자. 우리 사는 세상이 참 넓다는 것을,

이베리아 반도에는 스페인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또 이해하자.

















반성과 다짐의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길 건너편 슈퍼마켓에서 희재가 사다 준 흰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키다가,

코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에 깜짝 놀라 아스팔트바닥에 쫙 뿜어내버린다.

혀에 남아 있는 쓰디쓴 맛의 상한 우유를 한참 동안 퉤퉤 뱉아내고 보니, 배움이고 다짐이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제 아무리 다시 오지 않을 관광객이라지만 그렇다고 날짜 지난 우유를 팔다니!!

이번에야 말로, 히드로 공항에서 끝내 내뱉지 못한 말, “브링 유어 수퍼바이어!!”를 짖어주리라..

물 불 가리고 싶지 않다. 눈에 뵈는게 없다.

게다가 지금은 혼자도 아니다. 지금 내 옆에는 한 인상 하는 친구도 한 명 있다!

저 멀리 동쪽 끝에서 돈 쓰러 오신 손님의 권리를 한바탕 표현 하기 위해, 슈퍼마켓으로 당찬 발걸음을 내디딘다.









한 인상 하는 내 친구 희재는 나를 가로막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팩에 인쇄된, 아직 일주일도 넘게 남은 유통기한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포장도 보통 우유팩보다는 두툼한 것이 뭔가 어색하다.

목장에서 풀 뜯는 소가 그려진걸 보니 유제품은 맞는 것 같은데,

우유처럼 색깔은 하얀게 참 곱지만 우유는 절대로 아니고

뭔가 진탕 썩은 내가 나는 걸쭉하고 이상한 식품이다.

식품이나 맞는지 원, 배낭족은 이런 여행지의 이상한 액체마저 이해해야 하는 걸까..













아프리카에서부터 올라온 이슬람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 대제국을 건설하고

그 방대한 땅을 800년동안 지배하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 인도, 심지어는 중국으로부터

기술과 사상을 받아들였다.

세월이 지나고 이슬람의 세력이 약해져셔,

기독교도들에게 차츰차츰 영토를 빼앗겨가면서도

마지막까지 그들이 생각한 천국을 표현한 건축물이, 바로 이 알함브라 궁전이다.





























아무런 꾸밈도 없이 투박한 외관에 의아해 하다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정교하고 현란해지는 장식과 타일들을 보니 이내

‘그라나다라는 에메랄드에 박힌 빛나는 오리엔트산 진주’라는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벽면에는 우상숭배를 금하는 이슬람교의 가르침에 맞춰 그림이나 조각 대신,

코란의 가르침들이 문자로 하나하나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다른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끼리 죽고 죽이는 모습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

알함브라는 단순히 지배자가 생활하는 궁전만이 아니었다.

이슬람인들에게 알함브라는, 이미 꼬르도바를 점령한 카스티야 왕국의 속국이 되어 그라나다로 내몰린채

언제 나라를 빼앗길지 모르는 불안한 권력을 누리면서

유서를 쓰듯 차곡차곡 지어 올린 이슬람 최후의 역사 그 자체였다.























나는 세비야의 알카사르에서처럼, 다시 잠깐 나를 잃는다.

이번에는 목숨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그 장대한 알함브라를  기독교도들에게 바쳐 버리고,

아프리카로 도망쳐 버린 이슬람의 마지막 술탄 보아브딜이 되어본다.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그해, 살아 남기 위해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한밤중에 혼자 몰래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보아브딜을, 이해해 본다.

스페인과 아프리카 대륙 사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는 배를 타면서 보아브딜은 계집애처럼 울었다지?















하지만, 덥다.

알함브라가 유럽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한 곳인 것은 인정하겠는데,

우리에게는 바로 그저께 본 세비야의 알카사르보다 조금 더 크고 화려한 건물일 뿐이다.

세비야에서 너무 큰 감동을 받아서였을까.

덥고 다리 아프다며 툴툴대는 희재를 다독이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나도 사실은 좀 지리하다.

지금 여기서 나가게 된다면 나중에 알함브라를 끝까지 보지 못한 것을 후회 하게 될거라고 애써 힘을 내지만,

나무 그늘에서 담배를 태우며 빈둥대는 희재에게 무심코 내뱉은 말로 속마음을 들켜버린다.















“야. 저기로 가 보자. 저쪽에도 출구 있어.”













결과론적으로, 이제 와서 그 때 찍은 사진들을 보니, 중간에 나와버린 것이 뼈저리게 후회가 되기는 한다.























남부 스페인의 한 낮 거리에는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오후 2시부터 5시경만 되면 해가 뻔히 떠 있는 대낮인데도 일순간 죽은 도시가 된 듯 고요해진다.

문을 다 닫아버린 가게와 차들도 거의 달리지 않는 거리를 바라보면 무섭기까지 하다.

여름철, 한 낮의 무더위가 계속되는 동안은 낮잠으로 기력을 회복하고,

대신 저녁 늦게까지 활동하자는 취지인, 바로 시에스타의 시간이다.

어떤 못난 귀족의 게으른 습관이 사람이 달나라를 여행하는 이 시대까지 여태 계속 이어지는지,

길거리에 나 앉은 거지도 이 시에스타 하나만큼은 철저하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같은 중북부 대도시에는 사실상 사라진 풍습이고,

엄청난 비효율 때문에 스페인 정부 차원에서도 공식적으로는 폐지했다는데

어쩌자고 이 남부에서는 에어컨이 씽씽 나올게 뻔한 은행까지 문을 닫아 버리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것 조차도 문화의 다양성 어쩌고 하는 논리로 이해해야 하는지, 정말 의문이다.










[이 게시물은 ▶◀ dr.레인님에 의해 2009-04-25 22:01:33 불펜 게시판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