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희재로 말할 것 같으면, 정말 대단한 인간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공사장을 전전하며 벌어 모은 돈을 주식으로 왕창 불려다가,

벌써 스물세살 때부터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압구정동에다 자신의 옷가게를 차려버렸다.

압구정동 고가도로 아래에서 페인트 스프레이로 그래피티를 할 때가

가장 마음이 편하다고 하고,

홍대 앞에서 술 퍼먹고 시비 거는 친구들이 있으면 또 일행과 합심하여

사뿐히 즈려 밟아주는 취미도 가진 말하자면 마초의 꿈☆을 이룬 네오히피라 하겠다.





별스럽게 생긴 문화유산들을 예쁘장하게 사진 찍어다가 이게 유래가 어떻니,

하지만 실상은 어떻니, 우리가 이걸 보고 느껴야 할 감정은 어쩌니 하면서

곡학아세하는 나와는 전혀 다른 취향을 가진 부류다.





희재는 책에 뻔히 나오는 유명한 관광지만을 돌아다니며 사진이나 찍는 나를 답답해했고,

나는 유럽까지 와서 옷가게를 기웃거리며 벽에 있는 낙서에나 관심을 쏟는 희재를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죽이 잘 맞기는 힘든 조합이었다.





















여행중의 동행이라는게 그렇다.

여지껏 살아온 배경이 전혀 다른 두 남자놈이 벌써 5일째 서로 5m이상 떨어지는 일이 없이

온종일 붙어 다니고 있으니 슬슬 트러블이 생길때도 되었다.





희재와 나는 2년동안 이루 말 할 수 없는 모진 일을 함께 겪은 전우다.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을줄 알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와 배려한 것이 아니라

그냥 반발심을 가슴 속 깊은 곳에 쌓아버린채 참아준 것이었고,

5일만에 그 인내가 한계를 드러냈다.





빨리 짐을 풀어헤치고 메스끼따를 보러 출발하자는 내 말에 희재는

오늘은 따로 다니자며 침대에 벌러덩 누워 버렸고,

나는 예의상으로나마 그러지 말고 같이 나가자는 말도 하지 않은채 혼자 숙소를 나와버렸다.







어쩔 수 없다.

사실, 희재를 만난 이후로는 그 동안 둘이서 술 마시고 이빨까는데만 정신이 팔려

혼자서 뭔가 깊이 있는 사색이나 성찰을 할 겨를이 없었다.

같은 사물을 여러 장 찍어서 개 중에 가장 잘 나온 한 장을 추려내야 하는 사진도,

옆에서 멀뚱히 서서 기다리는 희재가 신경 쓰여 충분히 찍기가 참 힘들었다.







내 몸뚱아리 하나 제대로 챙기기도 버거운 마당에

일정과 숙소, 교통수단이나 식단, 길 찾기 같은 모든 것을 혼자서 다 책임지는데도 지쳐있었다.

지도를 잘못 보고 헤매거나 말이 통하지 않아 쩔쩔매는 등의 이른바 ‘삽질’은

혼자서 다닐때나 둘이 다닐때나 똑같이 저지르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내 실수를 뒤집어 쓰는게 나 혼자 뿐이라면 어깨가 훨씬 가벼워질거다.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사진은 사진대로 예쁘게 찍고, 또한 나 자신과의 끝없는 대화로 가슴을 깊숙하게 후벼파서

기필코 깨달음을 얻으리라 다짐한다.















'중세'하면 보통은, 휘황한 성채에서 파티가 벌어지고,

얌전히 무릎꿇은 기사가 공주의 손등에 키스를 하며 서약하는식의 낭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중세의 유럽은 모든 면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뒤떨어진 지방이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로 제국의 도시는 파괴 되었고 도로는 잡초와 수풀에 묻혔다.

로마법은 잊혀졌고, 글을 아는 이라고는 몇몇 극소수의 성직자들 뿐,

거드름이나 피우던 귀족들도 사실은 읽고 쓸 줄도 모르는 무지렁한 자들이었다.

힘 있는 자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그저 예배당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 뿐이었던 참으로 한숨 나오는 암흑기였다.



그 시절의 스페인 땅은 아프리카에서 중앙아시아로 이르는 이슬람제국으로 편입되었다.

징기스칸이 이끄는 몽고군의 침략을 이들이 막아내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유럽, 결코 성치 못했을 것이다.



그 몇세기 동안의 스페인은 세계 문명의 중심지였고,

유럽의 다른 지방 사람들이 지구가 태양을 도는지 태양이 지구를 도는지도 모르던 와중에

발달된 과학과 예술로 혼자서만 찬란히 빛났다.

국민 문맹률은 놀랍게도 제로에 수렴했단다.







꼬르도바는 그런 스페인 전체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영한 도시였다.

사라센의 왕들은 꼬르도바를 이슬람의 중심지 ‘메카’가 있는 바그다드에 비견할만한 도시로 만들었다.





전 유럽에 인구 3만명을 넘는 도시가 좀처럼 없었던 마당에, 꼬르도바의 인구는 80만명에 달했단다.

도시 전체에 둥그런 돔 형태의 모스크가 700개나 되었고 포장된 도로는 우마차가 청소를 하였으며

밤에는 가로등이 켜졌댄다.





런던에는 그로부터 수백년 뒤, 프란시스 드레이크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며

바다의 패권을 장악할 때까지도 도로에 가로등이 없었고,

빠리 역시 태양왕 루이14세의 시대까지도 포장 되지 않은 도로로

사람, 소, 말, 돼지 할 것 없이 똥을 싸지르고 악취를 풍겼었다.

비가 조금만 와도 흙탕물이 철철 넘치는 늪이 되었던 건 당연지사,

그 오물이 넘치는 길바닥이 사실은 하이힐을 고안하게 한 배경이랜다.



그리고 꼬르도바는 단순히 돈만 많은 졸부의 도시만도 아니었다.

마호메트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지식을 구하라’라는 가르침에 충실한 왕들은, 70개의 도서관을 지었고,

궁정도서관에만 40만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온 세상의 지식인들이 죄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런 꼬르도바의 얼굴은 바로 대사원 메스끼따다.

흰색과 붉은색 벽돌을 교차한 아치 아래로 수백개의 기둥들이 장엄하게 줄줄이 늘어서 있다.

이중으로 된 아치는 자칫 답답해 보일 수도 있는 낮은 천장을 높아 보이게 하는 묘한 시각적 장치라는데.

끝에서 끝이 잘 보이지 않는 이 까마득히 넓은 홀 안에서 3만명이 한꺼번에 메카를 향해 예배를 드린 것이다.





















훗날 기독교도들이 꼬르도바를 점령하고, 스페인 왕의 허락 아래

대사원 한가운데의 기둥 일부를 뽑아내고 그 안에 고딕양식의 성당을 만들었다.









새로운 모습의 메스끼따를 보게 된 왕은 대주교에게

“이렇게 만들 줄 알았으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을..

그대가 만든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대가 파괴한 것은 이곳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것이었다.”라고 탄식했다 한다.



















뭐,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지붕아래서 이슬람교와 카톨릭교가 함께 생활 하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정말 특별한 사원이 탄생한 것인데,

이슬람양식과 고딕양식이 공존하는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 내기가 참으로 어렵다.





































메스끼따 앞은 또한 유럽에서 단 하나뿐인 아랍인 자치지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햇빛을 반사시키기 위해 흰 회칠을 한 담벼락들이 구불구불한 골목에서, 

나는 또 길을 잃었다.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한낮인데도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나 뿐이다.

온 거리가 조용하다. 그러고 보니 오후2시. 다시 시에스타의 시간인가보다.

덥다. 44, 45라는 숫자는 사하라 사막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수은주라고 생각했었다.

위도로만 따지자면 이곳은 한반도에서 가장 춥다는 중강진이랑 비슷한 위치인데

여기는 어쩌자고 이렇게나 덥단 말인가.





물론 고등학교 때 지중해성 기후가 어쩌고, 대륙성 기후가 어쩌고 배우기는 했다만

직접 와서 느껴보니 이렇게나 더운 이유를 도통 납득하지 못하겠다.

태양의 고장 대구에서도 더위를 별로 타지 않던 내가 목이 마르다고 1.5리터짜리 생수를 덜컥 사 지른걸 보니

확실히 남부스페인의 여름은 덥다.

이런 날씨 아래서는 아무것도 못하겠다. 한 낮에 낮잠 자라고 대놓고 시간을 정해 놓을만 하다.





























오후9시가 넘어 기온이 38도로 떨어지자 그 때서야 ‘아 이제 좀 선선하니 다닐 만 하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나 참, 구미나 대구에서도 38도면 폭염경보가 내려지는데, ‘38도니까 좀 선선해서 다닐 만 하구나’라니.

물론 습도가 낮으니 그늘에서만 있는다면 견딜만한 날씨이긴 하다만,

하여간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콜럽버스가 신항로 개척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이자벨 여왕을 알현했다는 알카사르. 경치 좋다.

자루 없는 도끼가 되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을 나의 이자벨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혼자 다니다 보니 희재가 자꾸 생각난다.

이 멋진 안달루시아의 신부를 볼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다니.

지금쯤 어디선가 연습장 하나 들고 담벼락에 그려진 낙서들이나 따라 그리고 있겠지.

어쩌면 날씨가 더우니 호스텔 방 구석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빨면서

선풍기 바람이나 쏘이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뭐 그쪽은 그쪽의 여행방식대로, 이쪽은 이쪽의 여행방식대로 그 나름의 가치가 있을게다.

어느쪽이 좋고, 나쁘고가 아니라 서로 다른거고, 우리는 각자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택하면 된다.





































그나저나 여행중에 이렇게 사이가 틀어져버렸으니 수습하는 것도 참 곤란한 일이다.

밤에 다시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할까.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버틸까.

어디를 갔고 어디를 갔었는데 네가 없었지만 참 좋았다고, 멋진거 많이 봤다고 우겨 넣어 버릴까.

마드리드에서도 계속해서 따로 떨어져서 다니자고 나온다면 그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닐 텐데 큰일이다.









대화가 부족했다.

고등학교때 친구 두 녀석은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진학하면서 필연적으로 베스트가 되어 버렸다.

둘이 한 자취방을 잡아 2년씩이나 함께 살면서도, 단 한번도 싸운 적이 없었댄다.

다른 친구들은 그게 말이 되냐고 거짓말 하지 말라고 믿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 녀석들의 방에 놀러 가보니 한번도 싸우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모든 갈등은 애써 말 할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한 녀석이 책상에 먹던 과자 봉지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면,

아무 말 없이 다른 녀석이 치워버리는 것이 일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식으로 아주 소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계속해서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터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패턴들이다.









하지만 녀석들 사이에는 상대가 먹다 버린 과자봉지를 대신 치워주는 일은 절대 없다.







“야 이 @#$%야 먹었으면 치워야 할게 아냐.”



“@#$!! 하여튼 좀 편하게 사는 꼴을 못 봐요. 못 생긴게.”



“뭐? 이#$가 그냥 닥치고 치우면 될 것이지..”



“아 알았다고. 누가 안 치운대? 치운다고. 아씨.”







실로 대화가 충만한 한쌍의 바퀴벌레였다.

비록 방법이 지나치게 과격하기는 하지만,

아무리 사소한 트러블이라도 그 때 그 때 바로 풀어버리니 묵은 감정이 쌓일 틈이 없다.

대화야 말로 바위를 뚫는 낙숫물을 차단할 가장 좋은 우산이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면서도 그만큼 놓치기 쉬운 방법이다.

사진도 좋고 일기도 좋지만, 그 전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동행과 뭔가 대화를 하자.















늦은 오후, 시내의 한 PC방에서 마주친 희재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필 이런데서 만나냐며 활짝 웃었다.









미워도 다시 한번, 우리는 같은 배를 탄 동지 아니냐고.

앞으로 마드리드까지의 남은 일정, 불평, 불만이 생길 수 밖에 없겠지만

그 때 그 때 자주 이야기하며 서로 풀어버리자고 합의하며,

화해의 주먹을 맞부딪친다. 쿵!!!



















에.. 이번 여행기는 고려대 안영옥 교수님의 ‘스페인문화의 이해’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대놓고 베낀 부분도 조금 있습니다. -_- [이 게시물은 ▶◀ dr.레인님에 의해 2009-04-25 22:01:33 불펜 게시판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