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유럽 2006] 제 32탄. 뮌헨 - 맥주가 박물관보다 좋은 한가지 이유.
소주 반병이면 얌전히 테이블 구석에 찌그러져서 죽어버리는 갸냘픈 주량을 가진 나지만,
그날따라 미친 맥주 바람이 불어 짤즈부르크를 포기하고 예정에도 없던 독일에 왔다.
뮌헨 중앙역에 도착한것은 점심무렵이 약간 지난시간이었고,
내가 가진 가이드북에 있는 전화번호 내에서는 숙소를 구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 호스텔에서,
방을 구한다는 내 어눌한 영어발음에 "방 없어요."라고
한국말로 대답하던 여자의 목소리가 참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바이블, '백배'에 실린 호스텔이다.
잠잘곳이 없다는 사실 보다 배낭족을 좌절시킬만한 사건은 별로 많지 않다.
하지만 나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창구에서 베네치아행 당일 야간열차를 예매해버린다.
물론 뮌헨은 볼거리가 아주 많은 도시이다.
시내 중심부에는 마리엔광장과 신시청사, 그리고 프라우엔 교회가 있고,
호프브로이하우스와 독일박물관, BMW박물관, 최초의 나치 집단수용소인 다하우 수용소가 있다.
이 뿐이랴, 바로크양식의 건물중에는 가장 큰 님펜부르크성과 예술가들의 거리인 슈바빙,
종합예술센터 레지덴츠에 이런저런 각종 미술관들...
근교의 퓌센에는 디즈니 로고의 모태가 된 노이슈반슈타인성도 있다.
한루만에 다 돌아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레지덴츠나 슈바빙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 예쁘다는 노이슈반슈타인성도 관심이 가지 않는다.
퓌센에서 얻을 수 있는거라고는 완벽한 달력사진 한장뿐이라는 것을 이미 주워들었던 터다.
오로지 맥주, 맥주, 저녁무렵까지 기다렸다가 호프브로이에 가서 그저 맥주만 마시면 된다.
그리고는 야간열차의 간이침대에 누워,
내일 아침이면 내 앞에 다가와있을 대망의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누구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저 내 가슴이 이끄는대로, 내 발걸음이 움직이는 곳으로 가기만하면 된다.
자유다. 내게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두개의 막강한 자유가 함께 있다.
사족으로, 이렇게 혼자서 떠난 자유여행의 메리트를 흠뻑 즐기던 나는,
아주 나중에서야 이런방식의 여행이 주는 치명적인 폐해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
사람이 넘쳐나는 뮌헨의 중심가인 마리엔광장.
뭐라 할말도 없다. 유럽의 여느 도시들보다 깨끗한 분위기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아주 몰개성한 번화가다.
웅장한 시청사와 시계탑이 꽤 고풍스러워 보이지만,
지어진지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는 가이드북의 설명에 괜히 김이 샌다.
뮌헨이라는 도시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온통 호프브로이하우스의 맥주 뿐이고,
오직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찾은 독일박물관이건만,
여지껏 보아온 미술전시관이나 박물관과는 월등히 다른 스케일에 어안이 벙벙하다.
진자, 분동 같은 기초적인 물리학 기구 부터 시작하여 증기기관, 인쇄기계, 발전기,
마차, 방적기, 전차, 기차, 승용차, 항공기, 우주선, 음악, 영화 등등 ..
산업혁명 이후로 '과학기술'의 힘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요소에 대해서는
그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발전 과정을 철저하게 조망해 놨다.
자고로 기계란 만들고나서 100년동안은 고장이 나지 않아야 한다는게 독일사람들 사고방식이다.
기계의 작동원리를 모른다는 일은 그저 안타깝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회의 근간을 해치는 일이란다.
그런 까닭에, 독일박물관에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그 원리를 하나하나 깨우쳐갈 수 있도록 직접 움직여볼 수 있도록 한
전시품들이 온통 득시글거린다.
과연 기술강국 독일이다. 자신들의 기술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고,
이런 것들을 다음세대로 물려주기 위한 노력도 이렇게 부단히 하고 있는 것이다.
국립박물관부터가 이런식이니, 일선 학교에서 어떤식의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지도 훤히 보인다.
이래서는 도통 이들을 당해낼 수가 없다.
독일에서 법과 질서란 곧 상식이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질서의 수호자인 경찰력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고도 얼핏 들은 듯 한데,
경찰이 없는 곳에서는 스스로 경찰의 역할을 대신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나보다.
나는 그랜드피아노를 실제로 본게 처음이다.
그랜드피아노보러 독일 까지 온 건 아니겠지만 하여간
내 인생의 지난 시간동안은 그랜드피아노를 실제로 볼만한 기회가 없었다.
전시물을 지키는 사람은 찾아 볼 수 없고,
한참 먼쪽에 별 개성 없게 생긴 아주머니 한분만 어슬렁 어슬렁 걸어오고 있을 따름이다.
'전시물을 만지지 마세요.'라는 푯말이 붙어있건 말건,
나도 모르게 건반으로 손이 간다. '솔솔랄라솔솔미 솔솔밈미레...'
저 멀리서 어슬렁거리던 아주머니,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타협할 구석이라고는 도통 기대 할 수 없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한다.
"손대면 안돼요!!"
문간 머쓱해져서 뒤로 물러난다. 마땅히 할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남이사 뭘 하든 신경 안쓰는게 서양사람들이라던데,
독일인들을 로보트민족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다.
방대한 전시규모에 기가 질려버린데다가, 로보트아줌마랑 다시 마주칠까 두려워서
박물관을 절반도 채 훑지 못하고 자리를 떠버린다.
해가 지기 전에 가봐야 할 곳이 한군데 더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BMW.
비엠베.
이왕지사 뮌헨에 온 이상, BMW박물관은 꼭 가야하는 곳이었다.
사실 나는 자동차에 대해서는 별로 잘 알지 못한다.
다만 BMW에는 각각 숫자를 더해갈 수록 고급스러워지는 3,5,7시리즈가 있고
스포츠카인 Z시리즈, 스포츠세단인 M시리즈가 있다는것 정도만 귀동냥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BMW M5를 꼭 한번 타보고 싶었다.
그 녀석을 알게된 것은, 한참 게임에 빠져살던 무렵, 니드포스피드라는 게임에서 였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는 급커브에서 원심력 때문에 바깥쪽으로 튕겨나가기 마련인데,
엔진의 힘으로 몸체를 커브 안쪽으로 우겨 넣어 버리던 새하얀 BMW M5는 내 마음을 홀라당 뺏아가버렸다.
무척이나 유치한 동기지만, 원래 시작이란게 다 유치하다.
마이클조던도 자기 친형보다 농구를 더 잘하려 노력하다보니 농구황제가 되었다지 않는가.
여하튼 그 때부터 나는 M5를 사모하게 되었다. BMW M5는 내 물욕의 정점이 되었다.
남자는 M5다. BMW M5를 타는 남자가 되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돈을 벌도록 하자.
뮌헨에 있는 BMW본사 건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건물 옥상이 헬리콥터 프로펠러모양의 BMW로고로 보인다고 한다.
로고가 프로펠러 모양인 것은 BMW가 항공기 엔진을 생산하는 회사로 첫 출발을 했기 때문이고,
로고의 파란색은 바이에른주의 푸른하늘, 흰색은 알프스의 흰눈을 각각 상징한다.
BMW박물관은 대규모 신축공사중이었지만,
공사장 한쪽 귀퉁이에 조립식건물을 지어 전시관을 일부 운영하고 있다.
BMW가 생산하던 초창기의 클래식 세단들과 자전거, 오토바이 다 멋지고 좋지만,
이런건 아까 독일박물관에서도 많이 봤었다.
정작 내가 원한 '최신 BMW시승 기회' 같은건 없다. 아..
그나마 나름대로 신형 스포츠카인 Z1을 발견!!
전시품에 손을 대면 안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트렁크쪽에 삼각대를 받쳐놓고, 여행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글리코리안이 되어 본다.
대신 누구에게도 들키지는 않았다.
애써 합리화를 더 하자면, 이건 신차 시승코너를 마련해놓지 않은 박물관측의 불찰이다.
동네 자동차 판매대리점을 가도 당연히 차 문을 열고 시트에 앉아 볼 수는 있는데,
본사가 직접 운영하는 박물관에 제아무리 BMW라지만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구닥다리들만 가져다 놓고는
'No touch'라고 막아버리는건 판매자의 태도가 아니다.
게다가 나는 단순한 관광객도 아니고 가슴에 M5를 품은 사나이다.
나 같은 비엠베 사대주의자야 말로 막강한 관세장벽을 뚫고서라도
기어이 수입차를 한대 구입해줄 충성도 높은 소비자가 되는것인데,
장래의 소비자를 위한 배려를 찾아 볼 구석은 없다.
내가 어글리가 된 데에는 그 나름의 사정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최신형 BMW를 아주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출입구의 기념품 매장에 제임스본드가 타던 Z4가 있다..
진열대를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박물관 직원이
"단 59유로에 BMW오너가 될 수 있다니 공짜나 다름없다" 라는 농담을 던져온다.
그 친구가 무안해 할까봐 웃어는 줬다만, 역시 내가 알던대로다.
유머에 관한한 게르만족은 싹수가 노랗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M5도 있긴 있다.. 내가 원하던 흰색이었더라면,
가격이고 뭐고 앞 뒤 볼 것 없이 바로 질러버렸으리라 확신한다.
이 원리와 원칙의 나라 국민들은 하다못해 취미생활을 할 때도
잔디밭에 누워 마냥 빈둥거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단다.
스포츠야 말로 가장 알찬 여가라고 자부할만한 구실이다.
축구는 그 중에서도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그려낸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인생의 축소판쯤 된다고 한다.
BMW박물관이 위치한 곳은 사실 1972년 뮌헨 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한 올림픽공원 한켠이다.
널찍한 실내 체육관 안에는 놀랍게도 시민들을 위한 풋살코트가 몇개씩이나 마련되어서,
누구든 이용할 수 있게 관리 되고 있다.
스포츠강국이란 단순히 국가대표팀이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스포츠를 좋아하는이라면 누구나 언제든지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나라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는..시민들을 위한 풋살코트는 커녕,
프로선수가 아닌 이상 평생 잔디가 깔린 경기장에서 축구 해보기도 힘든데,
어떻게 보면 독일 같은 나라와 지난 월드컵 4강에서 대등하게 경기한 우리나라가 정말 대단하다.
드디어 해가 졌다.
마침내 찾아간 세계에서 가장 큰 맥주집. 5000석을 자랑하는 호프브로이하우스.
혼자지만 전혀 머쓱하지 않다. 이미 20일간의 연륜이 쌓인 몸이다.
홀 안을 휘적휘적 걸어다니다가, 친구사이로 보이는 한국인 여자 배낭족 두명이 앉은 테이블로 찾아가서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시죠? 저 혼자 와서 그러는데 같이 앉아도 괜찮겠어요?" 라고 말을 걸기만 하면 된다.
화제는 많다. 아가씨들은 빠리로 갈 예정이고, 나는 빠리에서 5일을 머물렀으니
몽마르뜨에서 행운의 실을 걸어주려고 덤벼들던 흑인친구를 여기서 유쾌한 술안주로 삼으면 된다.
2,000cc나 되는 맥주에 흠뻑 절은 포동한 배때지를 부둥켜 안은채 비틀거리며 나와서,
독일월드컵 메인스타디움, 아레나를 함께 둘러보고는 쿨한 작별을 고한다.
아레나를 홈경기장으로 쓰는 팀은 세팀이다.
바이에른뮌헨, 1860뮌헨, 그리고 독일국가대표팀.
각각의 팀의 유니폼 색상에 맞춰,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에는 붉은색,
1860뮌헨의 경기에는 푸른색, 그리고 독일국가대표팀의 경기에는 흰색 조명이 켜지는데,
바이에른뮌헨대 1860뮌헨간의 경기에서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태극무늬를 이룬 조명이 켜진다고 한다.
경기가 없는 오늘 같은날 밤에는? 대략 15분간의 간격으로 붉은색, 푸른색, 흰색이 멋대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떠난다. 이탈리아로. 물의 베네치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