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유럽 2006] 제 33탄. 베네치아 : 불쌍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
희한한 도시다.
집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고 인도로 사람들이 다니는 것 까지는,
베네치아는 여느 도시들과 다른 점이 없다.
하지만, 도로에 있어야 할 차가 없다. 심지어는, 도로도 없다.
도로가 있어야 할만한 곳으로는 아스팔트 대신 물이 흐르고,
차 대신 작은 배들이 둥둥 떠 다니며 사람들을 실어다 나르고 있다.
물론 베네치아가 물 위에 떠 있는 도시라는 것쯤은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뻔히 아는 일이라도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 느끼는 감흥은 전혀 새롭다.
대관절, 끈적이고 습하고 푹푹 빠지는 갯벌에 말뚝을 수백만개씩이나 박아 넣고
그 위에 집을 짓고 다리를 연결하는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였을까.
베네치아를 세운 사람이 훈족의 이동에 밀려난 롬바르디아인들이라는 것까지는
나도 들은 풍월이 있어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땅을 지키면서 끝까지 싸우다 죽자."
"로마나 나폴리로 내려가서 걔네한테 한 번 부벼보자."도 아니고
"저쪽 갯벌에다 말뚝 박아다 집 짓고 살자. 거기까진 안 쳐들어 올거야." 라는
얼토당토 않은 의견을 처음 내놓은 사람은 대체 뭘 먹고 큰 사람일까.
또, 그런 말을 믿고 따라가서 정말로 바다 위에다 도시를 건설해버린 사람들은?
도시라는 곳이 탄생하고 발전하려면 일단 기름지고 물 맑은 땅에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정착하면서 규모가 점점 커지는 것이 올바른 순서인데
베네치아는 일단 그런 순리와는 거리가 멀다.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 콜로세움 같은 대건축물처럼 절대권력자의 의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이민족들에게 ㅤㅉㅗㅈ겨 바닷가까지 밀려난 이들이 생사를 걸고 맨 손으로 일궈낸 생활의 터전이다.
그리고 베네치아는, 단순히 물 위에 떠 있는 아름답기만 한 도시만도 아니었다.
한참 잘 나가던 시절의 베네치아 공국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크레타섬까지 점령해서,
지중해를 주름잡고 저 멀리 중국으로까지 교역로를 개척했다.
'동방견문록'의 마르코폴로도 베네치아 사람이었고,
컴퓨터 게임 '대항해시대2'를 할 때도 지구 끝까지 따라 붙으며 내 함단을 못살게 굴던
해적들이 타던 배도 바로 베네치안 갤리스였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관광도시가 된 베네치아는 여전히
복잡하고 어지럽고 지저분하고 습하고 냄새 나고 아름답다.
산마르코 광장에서 살모넬라균을 잔뜩 품은 시궁새들에게 모이를 사다 뿌리면서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 짓고 있는데,
회랑 한쪽 노천까페에서 이 덥고 습한 날씨에도 완전 정장차림으로 손님들을 맞는
멋쟁이 중년 웨이터가 눈에 들어온다.
올커니. 여기가 바로 유럽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팔았다는 곳.
300년 전통이 빛나는 카페 '플로리안'이겠거니.
스탕달을 위시하여 루소, 괴테, 바이런, 릴케 등 쟁쟁한 상류층 인사들이 그렇게나 사랑했다는 곳.
평소에는 사교와 교양, 담론 등이 고상하게 오가다가도
나폴레옹의 지배하에서는 시민 저항의 사령부가 되었다는 곳.
또 한편으로는 도박과 매춘, 장물거래의 소굴이기도 했다는 곳.
카사노바가 여기서 따간 돈만 수억이고, 후려 갈긴 여인들만 사열종대로 연병장 두바퀴랬지.
카사노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시중에 풀린 가이드북들은 희대의 탕아 카사노바가
탄식의 다리를 통해 감옥으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만 잠깐 언급할 뿐,
그림으로 가려둔 천장에 쇳조각으로 구멍을 뚫고 침대 시트를 찢어 만든 밧줄로 영화처럼 탈출했다는
더욱 극적인 이야기는 죄다 빼먹고 있다.
어차피 그네들이 설명할 것은 탄식의 다리의 '탄식'이지, 카사노바의 드라마틱한 삶은 아닌 까닭인가보다.
좌우당간 플로리안의 중년 웨이터는 남자가 봐도 참 멋지다.
이런 곳에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 한잔 하는 것도 참 괜찮은 낭만일텐데,
나는 그 옆에서 쭈그려 앉아 생수통을 부여 잡고 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중국인들이 솔직히 부럽지만 별로 비참하지는 않다.
테이블에서 보는 풍경이나 바닥에 앉아서 보는 풍경이나
별반 다를 게 없고, 무대에서 연주하는 음악도 충분히 다 들려온다.
내가 돈을 아껴야 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일 뿐,
주관적으로 비참해야 할 필요는 없다.
과연 저 중국인들이 자신들이 앉아 있는 카페의 내력을 제대로 알기나 할까라는
삐딱한 의구심으로까지 생각이 미치자 묘한 승리감마저 생긴다.
바보 같은 생각인줄은 알지만, 세상 모든 일은 결국 많이 아는 놈이 이기는 법이다. 중요한건 돈이 아니다.
하지만 곤돌라는 정말 한번 타 보고 싶었다...
한번 운행하는 비용은 인원수에 상관 없이 우리돈으로 10만원 가량이다.
이탈리아 관광청에서 책정했다는 65유로의 정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다섯명을 모은다면, 내가 지불해야 할 돈은 2만원.
배 타고 동네 한 바퀴 돌면서 덤으로 노래 한곡 듣는데, 2만원.
결국 곤돌라는 접어 두고, 아쉬운대로 수상버스 바포레토를 타며 경치를 즐기기로 한다.
곤돌라에서 보는 풍경이나 바포레토에서 보는 풍경이나 역시 도긴개긴일테고,
곤돌라를 탔다면 결코 바포레토의 내 옆자리에 앉은 이 귀여운 꼬마아가씨와 짧은 데이트를 즐기지는 못했겠지.
그리고, 꼬마 아가씨의 아버지로부터 한장에 2유로씩이나 하는 지도를 거저 얻지도 못했겠지.
다시 묘한 승리감에 젖어 든다.
아마 아부지가 그랬던가, 나는 세상을 참 편하게 산다고. 
응? 
어라?
그 날 베네치아를 찾은 관광객들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다 말고 갑자기 “으아악”하고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싸매는
젊고 못생긴 동양인을 한 명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카메라가 또 고장났다.
이번에는 광각 렌즈가 조리개를 조으지 못한다.
물론 조리개를 조으지 않더라도 사진은 찍을 수 있지만,
화면에 보이는 모든 부분에 촛점이 선명하게 맞아 떨어지는 '팬포커스사진'을 찍을 수는 없다.
그리고 여기는 이탈리아이고, 이 나라 어디에서도 내가 원하는 대로
이 증세를 즉시 고칠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런 곳에서 성질 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차피 멀쩡한 장비가 있다 해도 내 실력으로 퓰리쳐상 받을 만한 사진은 찍지 못한다.
세상은 편하게 살아야 한다.
결국 앞으로의 일정은, 반셔터를 잡지 못하는 고장난 바디와
조리개를 움직이지 못하는 광각렌즈로 꾸려가게 되었다.
베네치아에는 발을 디딜 땅이 귀하다.
작은 공간이라도 최대한 아끼고 활용하려고 만들어 놓은 이렇게 좁디 좁은 골목길이 아주 많다.
단순히 좁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미로처럼 구불구불 굽어 있어 한번 길을 잘못 들게 되면
방향감각이 어지간히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나가는 길을 찾아 내기가 아주 힘들다.
아닌게 아니라, 이 복잡한 골목길들이 침입자들을 지연시키는데
더 없이 훌륭한 바리케이트가 되어주기도 했단다.
침입자는 아니지만 방향감각이랑은 별로 친하지 않은 나도 단박에 길을 잃고야 만다.
하지만 헤매야 하는 뒷골목들 역시, 베네치아다.
그저 발길 가는데로 걷기만 하면서 골목골목의 아름다움을 즐기면 되는 곳이 역시 베네치아다.
왼쪽으로 틀었다가 오른쪽으로 틀어보고, 한번 가본 길이나 막다른 골목이 나타나면
그냥 되돌아가면서 행복한 미아가 되어본다.
더운 날씨 아래에서 한참을 걸으면서 시원한 코카콜라가 딱 한잔만 먹고 싶었는데,
기막히게도 눈앞에 새빨간 코카콜라가 나타났다..
이 골목을 벗어나서 대로로 나가게 된다면, 맛있는 조각피자와 함께 저 500ml 오지지널 코카콜라를 사먹어야지.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한다.
이탈리아는, 베네치아는 정말 환상적인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