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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부지 생각이 난다.
아부지 생각이 난다니 퍽이나 거창해 보이지만,
뭐 돌아가신 아부지도 아니고 어디 멀리 가 계신 아부지도 아니고
지금도 고향에서 중삐리 고삐리들 잘 가르치고 계시는 그냥 평범한 우리 아부지다.
대화라고는 '책 사게 돈 좀 줘요.' '너거 엄마한테 달라케라.'
'안 자나? 자라 좀.' '좀 만 더 보다가요.'
정도가 전부인 삭막한 경상도부자지간이지만,
군대가서 간첩도 잡아온 늠름한 아들놈이
50일씩이나 남의 나라를 헤집고 다니겠다는 말에
그래도 걱정이 되셨는지, 우리 아부지는 딱 한가지를 물어보셨었다..
"먹는건 어얄라 카노?"
사실은 먹는게 가장 큰 걱정거리 맞다.
걱정할만 하다.
다리가 부서져라 걸어다닐 수 밖에 없는 여행중의
하루 평균 권장 열량이 4,000킬로칼로리 정도 된다.
내일의 일정을 위해서라도 잘 먹어둬야 한다.
서울도 아니고 유럽씩이나 온 촌놈이 먹어 보고 싶은건 많지만,
주머니 사정은 탐탁치 못하다.
매끼니 마다 레스토랑에 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뭘 먹을까.
해답은 슈퍼마켓이다.
영국, 스위스, 그리고 북유럽의 물가는 칼 안든 강도지만,
어딜가나 장바구니 물가는 납득할만한 수준이라지 않던가.
테스코, 모노프리, 까르푸같은 할인마트에서 식재료를 사다가
호스텔 부엌에서 정체불명의 이상한 음식을 해먹을 수가 있다.
(뭐든지 라면스프랑 같이 냄비에 넣어서 물 붓고 끓이면 일단 소화는 된다!!
꼴마에서 해 먹은, 라면 국물을 곁들인 쭈꾸미 파스타!!)
점심은 빵과 과일을 사다가 길에서 간편하게 해결 할 수도 있다.
그 중에서 칼로리가 높은 바나나, 가격대 무게비가 뛰어난 바게뜨빵,
단백질 공급원 우유는 싼 값에 여행의 건강을 책임지는 삼총사랍시고
단 하루도 거른적이 없다.
덕분에 50일 동안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지만,
다녀온지 1년이 다 지나간 이 마당에도 바나나냄새만 맡으면 기분이 확 상한다.
왜 애꿎은 바나나 보고 인상 쓰냐는 친구들의 물음에
"유럽에서 바나나만 먹었거덩~" 이라고 대답하면
또 유럽 이야기냐고 재수 없어한다. 안 가본 사람은 모른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만큼은 바나나, 바게뜨, 우유를 단 한번도 먹은적이 없다.
피자 사 먹으면 된다. 바나나 끝이다. 피자다.
그저 피자가 좋다. 얍쌀하고 담백하고 바삭바삭한 정통 이탈리아 '핏짜'는,
한 입 베어 물면 눈의 흰자위가 정말로 돌아간다.
아침 일찍 일어나 민박집에서 밥과 김치를 사정 없이 밀어 넣고 나와서 돌아다니다,
이른 점심으로 피자를 한판 사 먹는다.
걷다 보면 또 배가 금방 고파지기 때문에 허기를 달래기 위해
길에서 조각피자를 한 조각 사먹는다.
저녁이 되면, 민박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사람들과 어울리다
'오늘 새로운 분들도 많이 오셨는데
미켈란젤로 언덕 다시 함 가 볼까요?'라는 말에 우르르 따라나서서,
잘 놀다 들어가며 야참 먹자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마지막으로 피자 한 조각을 기어이 사 먹고야 만다.
피렌체에서 있는 동안 실제로 벌어진 사실들이다.
내 뱃속에는 무슨 슈바르츠실트 피자 블랙홀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5일동안 베네치아와 피렌체 근교를 둘러본 짧았던 이탈리아 일정의 마지막날,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서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조각피자를 사 물고 다니던 나는 고민에 빠졌다.
오븐에 대충 구워다 길거리에서 1유로에 파는게 이정도 맛인데,
그렇다면 화덕에 굽는 진짜 원조 나폴리 마르게리따 피자는 대관절 어떤 맛이길래??
서울에 잠깐 출장 와서 맛본 비빔밥의 맛이 너무나 매력적이라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전주로 내려가서
원조 전주비빔밥을 먹고 감탄했다는 외국인의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그래. 나도 나폴리로 내려가는거다.
원래 계획도 나쁜편은 아니었다.
나흘동안 카르카손, 루르드, 떼제, 페르피낭, 에즈, 생폴드방스 같이
비교적 덜 알려진 프랑스 남부지방의 소도시들을 찍고 턴하여
'이름이나 들어 봤냐 난 니들이 다 가는 런던빠리로마 말고
이런데도 가봤다 하지만 뭐 절대 자랑은 아니다.
백배에 나와 있지 않으니 너희들은 알지도 못할 곳을 나는 직접 경험했지만,
정말이지 자랑하는건 아니다.'
라는 패턴의 잘난척을 할 계획이었다.
그런 잘난척은 좀 덜해도 된다.
다만 나폴리 피자는 꼭 먹어야겠다.
폼페이, 아말피, 포지따노 같은 근교 여행지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해
일정에서 제외시킨 나폴리이지만, 오직 그놈의 피자때문에,
일정의 하루를 덜어서 나폴리행 ESI에 올라탔다.
그리고 오직 그놈의 피자 때문에, 나는 남부프랑스에서의 계획 대부분을 취소하고
3일을 내리 나폴리에서 보내게 된다.
더럽고 냄새난다고 베네치아를 욕했었지만,
사실 베네치아도 나폴리에 비하면 양반이다. 아주 양반이다.
매연과 소음과 구질구질한 가난이 찌든 이 도시는, 동남아나 남미 어느 곳 같다.
유럽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강도나 소매치기를 겪어본 적은 없지만,
골목 언저리에서 누군가가 칼들고 나와서 '가진거 다 내놔!' 라고 한대도
절대 어색할만한 분위기가 아니다.
태양은 강렬하고, 바닷바람은 습하고 찐득찐득하다.
기차는 연착 되지 않고 제 시간에 도착 할 때도 가끔 있다.
사람들은 무질서하기가 상하이보다 아주 조금 나은 정도다.
나폴리가 호주의 시드니, 브라질의 리우와 함께 세계 3대 미항이라는 말은 믿을수 없다.
아마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일 것이다.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라니, 나폴리를 보면 복장이 터져 죽겠다.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원조마르게리따피자 딱 하나 뿐이다.
그래, 원조 마르게리따.
가격부터가 믿어지지 않는다.
음료수와 세금을 죄 포함한 피자 한판이 5유로.
시장피자 수준이다.
다미쉘 Da Michele 의 피자를 처음으로 입에 넣은 순간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은,
지금도 이해가 되다 말다 한다.
나는, 누군가 내 피자를 뺏아 먹으려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두려워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두번째 조각을 입에 넣은 순간에도 피자조각은 입 속에서 사라지고 없다.
목구멍으로 무언가가 느껴지는걸로 봐서 무슨 걸쭉한걸 넘긴것 같기는 한데,
음식물을 '씹으면서 맛을 보다가 삼킨' 과정이 기억나지 않는다.
금붕어도 기억력이 3초는 간다던데, 마르게리따는 날 물고기보다 못한놈으로 만들었다.
세번째 조각을 넣으면서 비로소 '맛있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맛있다. 맛있는데, 보통 맛있는게 아니다.
삼겹살보다, 구구콘보다, 김치볶음밥보다, 냉면보다, 족발보다, 교촌치킨보다,
여태 먹어온 그 어떤 것보다 맛있다.
세상에는, 나폴리의 마르게리따 같은게 있었구나..
생각보다 본능이 먼저 움직인다.
먹으면서도 이 조그마한 피자한판이 점점 없어지는게 안타깝다.
마지막조각을 입에 넣을 때까지도, 나는 내 손가락을 씹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텅 빈 피자 포장박스를 보며 또 고민에 빠진다.
'맛있게 잘 먹었다. 과연 최고의 맛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간다면, 나는 이맛을 그리워 하며
대한민국의 모든 피자집을 원망하겠지.'
자기 생일날 피자헛 리치골드를 쏘면서 잔뜩 기분을 낸 친구에게
'나폴리 피자가 어쩌고..' 하면서 분위기 싸하게 만드는 내 모습이 안 봐도 비디오다.
안타깝다. 내사랑 다미쉘.
이렇게 스쳐가는 인연이었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했었어.
아쉬워하지 않을 방법은 단 하나 밖에 없다.
다시는 다미쉘 피자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도록, 질릴 때 까지 피자만 먹어서,
정말로 질려버리게 된다면,
다시는 나폴리를 그리워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이 나폴리 피자라는 말만 나와도 침을 번들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울때,
한쪽 구석에 기대고 앉아 말 없이 눈을 지긋이 내리깔고 속으로만 '훗, 그 까짓거..'
하면서 피식 웃는 것도 괜찮은 풍경일 것 같다.
나폴리에서 머무는 3일동안, 다미첼만 무려 네번을 갔다.
민박집 아주머니께서 차려주시는 아침과 저녁은 과분한 수준이었지만,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질리도록 먹어야 하는 저주가 걸려 있다.
1년이 지난 지금, 다미쉘을 뼈저리게 그리워하고 있다..
그만큼 먹었으면 질릴만도 한데 도대체 이놈의 다미쉘은 질리지도 않는다.
한번만 더 먹을걸..
그럴리야 없겠지만 다미쉘이 압구정동 같은 곳에 체인점을 낸다면,
가격이 얼마가 되건 한 달에 한번씩 쫓아가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더라도 먹어 줄텐데..
다미쉘에 걸려 있는, 나폴리의 영웅 마라도나의 사진.
나폴리 하면 또 축구신동 마라도나 이야기를 빠트릴 수 없다.
이탈리아는 사실 로마제국의 붕괴 이후로 천년이 넘도록
여러 도시국가로 갈갈이 분열된 상태였고,
빅토리오엠마누엘레2세, 카보우르, 가리발디의 노력에 힘입어
'이탈리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통일이 된 것은 고작 100년이 조금 넘은 일이다.
밀라노나 베네치아, 토리노, 피렌체처럼 금융업과 상공업이 발달한
북부의 도시국가들로는 사람과 돈이 모여들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남부의 나폴리왕국은 산업혁명에서 소외되어 지금까지도 주요 산업 중
농업의 비중이 높아서 북부와 남부사이의 경제격차는 아찔한 수준이라 한다.
북부 사람들은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남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금을 탕진한다고 생각한다.
남부에서는 북부사람들을 더러 차갑고 거만하며 운 좋게 잘 사는 동네에서 태어난 덕에
자기네가 뼈 빠지게 키워 놓은 농산물을 착취하며 호의호식한다고 생각한단다.
남부와 북부는, 애초부터 다른 나라라는 인식이란다.
무엇하나 북부보다 나을 것이 없는 이 땅에,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 아르헨티나의 축구신동 24세의 젊은 마라도나가 입성한다.
유럽에서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도시들간의 전쟁이 '법적으로' 금지된 오늘날,
유럽인들의 정치,문화,사회적인 경쟁의식은 바로 '축구'를 통해 나타난다.
유럽인들에게 축구는 도시국가시절 전쟁의 연장이고, 정치이고, 현실의 반영이고, 삶 그 자체이다.
북부의 AC밀란, 유벤투스, 인터밀란에 등의 명문 클럽 비해 역시나 보잘것 없던 나폴리축구팀은
마라도나와 함께 전성기를 구가한다.
마라도나가 있던 8년동안, 나폴리는 이탈리아 프로리그 세리에A우승, 컵 대회우승,
그리고 당시 유럽최고권위를 자랑하던 UEFA컵까지 우승하게 된다.
마라도나의 전성기는 곧 나폴리의 전성기였다.
오랜시절동안 북부에게 촌놈들이라며 철저하게 무시당해온 나폴리에게,
마라도나는 영웅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마라도나가 은퇴 한 지금, 그의 등 번호 10번은 나폴리에서 영구 결번이 되었단다.
그런데 마라도나가 한참 나폴리에서 활약하던 1990년에
이탈리아에서 월드컵이 개최되면서 일이 터져버렸다.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는 4강전에서 개최국인 이탈리아와 맞붙게 되었는데
경기 장소가 하필이면 운명의 나폴리였다.
이미 6년동안 나폴리에서 뛰어오며 나폴리 사람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아온 마라도나는,
북부와 남부의 감정의 골, 오랫동안 북부에게 천대 받았던 나폴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경기 전날의 기자회견에서 마라도나는 직격탄을 날린다.
"나폴리팬 여러분, 나를 응원해 주십시오."
북부만을 위한 이탈리아는 사실 조국도 아니다.
그렇다고 아르헨티나라는 국가를 응원해달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랜시간 함께한 나폴리의 친구인 자신을 응원해달라는 말에,
나폴리 축구팬들은 패닉상태에 빠지게 된다.
경기 당일, 나폴리 축구경기장에서 나폴리인들은 대놓고 아르헨티나를 응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탈리아를 적극적으로 응원하지는 않으며 그라운드를 묘한 분위기로 끌고간다.
이탈리아는 결국 압도적인 응원으로 분위기를 장악하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 하고, 승부차기끝에 아르헨티나에 패하고 만다.
열여섯살 때부터 프로리그에서 뛰기 시작한 ‘초신성’ 마라도나가
나폴리 처럼 별볼일 없는 팀으로 간 이유는,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나폴리 출신 할머니 때문이랜다.
하지만 이 아저씨가 이런 구질구질한 도시에 8년씩이나 엉덩이 깔고 있었던 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분명히 할머니 보다는 다미쉘 피자 때문일거다.
“감독님, 전 이제 나폴리가 싫어요.
할머니 돌아가신지도 오래고, 돈 많이 준다는 레알마드리드로 가고 싶어요.”
“닥치고, 입 아 벌려봐라.”
“냠~ 다미쉘의 마르게리따다.!!”
“니가 이걸 두고 떠날 수 있을까보냐. 3년간 계약연장!! 딜?”
“우물우물.. 에라 모르겠다. 콜!!”
비법이 대체 뭘까..
피자에 마약이라도 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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