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민박집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새빨간 방울들이 발등위로 뚝뚝 떨어지다가

바닥에서 확 퍼진다. 피다. 코피난다.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다 보니 나는 원래 코피를 자주 흘린다.

그러니까 평소보다 한시간 일찍 자든, 늦게 자든,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자든, 덜 자든, 잠자는 시간이 조금만 틀어지면 여지없이 코피가 난다.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그래도 내 코피는 아주 예의가 바른편이라서, 밖에서 한참 돌아다니고 있을 때 예고도 없이 퍽퍽 터지지는 않는다.

세수를 하거나 샤워를 할 때, 즉 이렇게 얼굴에 물을 찍어 바를 때만 동안 잠깐 고개를 내밀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코피가 멎기를 기다렸다가 잠자코 씻어내기만 하면 된다.




영화 레옹에서 주인공이 총상을 입은 채 샤워를 하면서 욕조에다 피를 뚝뚝 흘리는 장면을 굉장히 멋있어 했던 기억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내가 샤워를 하면서 흘리는 코피도, 여자를 구하다 총 맞아 흐르는 피 같은 것이

가끔은 나 자신이 무척 멋지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날은, 무슨놈의 코피가 비 온 다음날 트레비분수 마냥 미친 듯이 콸콸 쏟아지는 것이 도통 멈출 생각을 않는다.

고개를 숙여도 보고 뒤로 젖혀도 보고 목덜미도 주물러보면서 코피를 멈추기 위해 별 짓을 다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못 해먹겠다. 결국 코에서 피가 나든 말든, 휴지를 돌돌 뭉쳐 양쪽 콧구명을 꽉 틀어 막고 방으로 돌아왔다.

마침 이야깃거리가 바닥 났었던 참인지 같은 방에 있던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보고는 난리가 났다.

더운 날씨에 얼마나 고생하며 돌아다녔길래 그렇게 쌍코피가 터져서 멈추지도 않느냐고.

어지럽지는 않냐고. 며칠째 피자만 먹어서 면역력이 떨어진거라고.

죄 없는 피자는 왜 걸고 넘어지는지 알 수 없지만 여하간 자기 일도 아닌데

다들 호들갑스럽게 걱정을 해 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내일 카프리섬의 푸른 동굴로 같이 가기로 했던 형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말린다.

카프리도 좋고 푸른 동굴도 좋지만, 내일은 그냥 방에서 하루 쉬는 것이 어떻겠냐고.





당치도 않은 소리다. 배낭족에게는 돈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시간이다.

한두 시간도 아니고 무려 하루씩이나 이런 방 안에서 가만히 죽치고 있으라니 말도 안 된다.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내게, 그 형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설명을 해 준다.




“흥분하면 코피 더 나니까 가만히 내 말 한번 들어 봐요. 여행 한지 한달 쯤 돼간 댔죠?

그 동안 많이 돌아다니면서 볼 것도 많이 보고 사람도 많이 만나고 사진도 많이 찍었죠?

그런데 그 동안 살면서 그렇게까지 고생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어요?

내가 잘은 모르지만 별로 없었을걸?

거 왜 하느님도 일주일 동안 천지창조 하고 나서 피곤해가지고 마지막 하루는 쉬었다잖아요.

사람도 일주일에 한번은 쉬어 줘야 되요.

그래도 여행이니까 일주일에 한번은 너무 자주 쉬는 거고, 열흘이나 보름에 한번쯤?

나도 열흘에 한번은 아무것도 안하고 숙소에 가만히 누워서 쉬어요.

여행 처음 와서 신나가지고 빨리빨리 많이 보고 싶어하는건 누구나 당연한건데,

평소에 하던 일이랑 다르니까 몸이 슬슬 그렇게 축나기 시작하잖아요.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게 괜한 소리가 아니예요.

물론 내일 카프리 간다고 해서 당장 죽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여행이 더 힘들어질걸?

남은 일정도 많이 있으니까 미래를 생각해서 그냥 하루만 체력 보충하는 셈 치고 푹 쉬는 게 맞을 거 같아요.”








한마디 한마디에 경험 많은 배낭족의 연륜이 뚝뚝 묻어난다.

이 형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는게 맞을 거다.

결코, 우리랑 함께 출발하기로 한 옆방의 코가 오똑하고 몸매 날씬한 여학생이랑

나 떼 놓고 단 둘이서 카프리로 가기 위한 물 밑 작업은 절대로 아닐거다.

비록 만난지는 몇 시간 안됐지만, 나는 형을 믿는다.



하지만 마땅히 반박 할 말도 없다. 그 동안 얼마나 몸뚱아리를 험하게 굴렸던가.

버스나 기차를 한번도 타지 않은 적이 없었고 단 하루도 세시간 보다 적게 걸은 적이 없었다.

사진도 아무리 적게 찍어도 하루 백장씩은 찍었는데, 사진을 찍는다는게

사실 단순히 셔터만 누르는게 아니다. 올바른 위치를 찾아서 그 장소까지 허리를 숙이고,

까치발을 세워 들고, 심지어는 엎드리면서 구도를 정해다가,

물론 자동카메라지만 그래도 조리개, 셔터스피드, 감도, 화이트밸런스 같은

세세한 것들을 하나하나 신경 쓰는 작업이 계속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여행을 다니는 일은 자발적 준노동으로 봐야 한다.





그러고 보니 나폴리를 경유하는 아말피나 폼페이, 카프리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었다.

애시당초 피자만 아니었더라면 나폴리에 올 생각도 없지 않았던가.

그래, 휴식이다.





조금만 천천히 가면 인생이 즐겁다던가?

지난 한달 동안의 아침은 매일 같이 숙소에서 식사를 입에다 ‘밀어 넣’고 이것 저것

가방 챙겨서 튀어나가기 바빴었는데,

아침부터 느긋하게 밥알을 한 숟가락에 스무번씩 꼭꼭 씹어 먹고

달콤한 식후의 커피 한잔도 타 마시면서

바로 어제까지의 나처럼 바쁘게 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참 색다른 여유다.



“오늘 같이 카프리 가기로 했잖아요?” 하는 물음에는 하품을 하고 배를 벅벅 긁으면서

“제가 좀 아파서요. 오늘은 쉬는 날 하기로 했어요~ 그냥 둘이 가세요. 죄송해요.”

라고 대답해 주는 이 여유.

‘그 형이랑 잘 해보쇼. 말빨이 좋은 사람이니 둘이서만 가는게 더 재미 있을거예요.

난 말 주변도 별로 없는데다가, 댁이 미인인건 인정 하지만 내 타입은 아니라서...’






여행이란 일상의 일탈이고,

여행중의 휴식이야 말로 일탈 중의 또 다른 일탈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자유배낭여행이 주는 참된 즐거움이다.






오전 내도록 침대 위에서 홑이불을 둘둘 말고 뒹굴거리다가,

점심은 늘상 먹던 다미쉘 피자 대신 시내의 그럴듯한 리스또란떼에서 스파게티를 먹어 보기로 했다.



입안에서 바다 내음이 퍼지느니, 파도소리가 들리느니,

어렸을 적에 쇼타 형이 만들어 준 바로 그 계란말이 초밥 맛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맛에 관해서 따로 자세하게 설명을 이어갈 재주는 없다.

다만 다시 태어난다면, 정말이지 나폴리에서 나폴리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맨날맨날 원조 피자와 본토 스파게티만 먹다가 배 터져 죽는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다가는 인생이 아닐까.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아니 당장 나폴리만 떠난다면 금도끼 은도끼를

종류별로 다섯자루쯤 준다고 해도 먹을 수 없을 것이 이

‘본토 스파게티 봉골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꿈에서 나온다.















사람이란 항상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든다.

그 동안 민박집이라고 하면 항상 배낭족들로 떠들썩한 분위기인줄로만 알았는데,

민박집이 붐비는 것은 사실 아침과 저녁 무렵뿐이었다.

배낭족들이 다들 밖으로 나간 한 낮의 민박집은 숨 막히게 조용하다.



거실의 컴퓨터를 독차지 해서 그 때 까지만 해도 한참 전성기를 달리던 밀린 싸이질에 몰두하는데,

아주머니께서 특별 서비스라며 귀하디 귀한 오렌지 주스를 한잔 내 주신다.

내 눈에는 그냥 지극히 평범하신 친구네 어머니 같으신 분이

어쩌다가 이 먼 먼 땅으로까지 오셔서 이런 일을 하고 계신걸까.

빠리 숙소의 지하 구내식당 흑인아저씨에게도,

학교 앞의 아랍계 닭꼬치 장사 아저씨에게도 차마 묻지 못한 말들을,

큰 마음 먹고 꺼내봤다.






“저.. 아주머니 왜 하필이면 나폴리로 오시게 됐어요?”



“으응. 처음에는 우리가 로마에서 민박을 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까 나폴리에서도

숙소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나폴리로 옮겼지.”



“그러니까 저기.. 어떻게 이런 일을 처음 하게 되신거예요?”



“으응.. 폼페이나 소렌토, 아말피 카프리를 가려면 아무래도 나폴리에서도 숙소가 있어야 하잖아..

민박친지는 사실 얼마 안됐어.. 한 2년 정도?”






….이래서야 대화가 진척되지를 않는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부분이 있고,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을 수도 있을 터이다.

‘유나이티드 이민자들’국가인 미국에서는 맨주먹으로 건너더라가도

잠 안자고 부지런히 일한다면야 누구나 목돈을 거머쥘 수 있다지만,

민족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존심이 뿌리 깊은 이 유럽에서는

관광객이 아닌 이민자가 단순히 생존해 나가는 것 조차 녹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다 여기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 젊잖고 신사적인 유럽도 아니고

이탈리아 하고도 나폴리가 아니던가.

더 이상 파고 들었다간 청춘을 잃어버린 비련한 한 한인여인 주연에,

조연으로 불치병을 앓고 계시는 부모님, 미술하러 유학 떠난 아들,

그리고 이탈리아 마피아가 등장하는

‘나폴리 소나무 민박 아주머니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인생역경’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출신성분’에 대해 더 이상 캐묻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싶다.






“여러 사람들 상대 하시려면 되게 힘든 일도 많으시죠?”



“호호호.. 그렇지.. 나는 그냥 편하게 해 드리고 싶은데,

좀 심하게 규칙도 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아줌마도 사람이니까 기분도 상하고 그렇지..

그치만, 학생들은 다 내 자식 같고 가족들이 오면 다 우리 친척 같고

우리랑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한테는 친구처럼 대하니까 별로 힘든 일은 없어.

돈도 부족하면서 빡빡하게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한테 밥이라도 한 끼 더 주고,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일 해 주는게 보람도 많아.. 여기서 지내고 간 사람들이,

홈페이지 게시판에다가 잘 지냈었다고 인사하는 글 올린거 볼 때는 아줌마도 정말 기분이 좋아.”




우문현답이다.

사실은 별 의미도 없는 그저 대화를 위한 질문이었지만, 아주머니는 참 진지하시다.



이를테면 바텐더가 단순히 술잔에 얼음을 채워 넣는 온더락을 만들때도,

얼음의 크기나 모양새에 따라 술 맛이 현저하게 달라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술이 소재인 것으로 봐서는 오랜 물장사 경력을 가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가 아닌가 싶은데,

여튼 세상의 무슨 일이든 오랫동안 파고 들면 깊이 있는 철학이 생긴다는 것이 주제였던걸로 기억한다.






당연히 그냥 돈을 지불했으니 밥 주고 재워주는 곳이라고만 알아왔었지만,

실상 휴식과 정보 재충전이라는, 여행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곳이 바로 민박집 아니던가.

볼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은 유럽에서 민박집 아주머니의 이 전혀 화려할 것 없이

훌륭하신 경영철학에까지 우리 배낭족들이 관심을 갖기도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조금만 눈길을 돌리면, 생각할 것들도 참 많다. 이 잘나신 유럽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