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남자한명인데요. 혹시 오늘 묵을 도미토리룸 있나요?"

"울랄라 울라라 방을 찾으시는군요.. 몇개 남아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예약을 따로 받지 않아요. 침대를 원한다면 빨리 오세요.

기다릴게요. 울랄라."

"아. 그래요? 네. 지금 빨리 튀어갈게요."



다행이다. 방이 있다니, 오늘 숙소를 못 잡게 되면 마르세유에서 바로

바르셀로나행 기차를 탈 생각이었지만, 오늘은 예정대로 아비뇽으로 가는거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 위치한 아비뇽은, 과거 왕권에 밀린 교황청이

로마를 벗어나 얼마동안 위치했다는것 말고는,

딱히 여행자들을 잡아끌만한 볼거리가 사실은 별로 없는 그저 그런 소도시다.

끽해야 구시가를 끼고 흐르는 론강 사이에 있는, 잘린 다리정도?

교황청이래봐야 교황의 권위가 한참 암울했던 시절 지어진 것이라

바티칸의 성베드로성당과는 감히 비교를 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해 초라하다. 교통도 그다지 편리한 편은 아니고,

하고 많은 유럽의 다른 여행지에 비해서 애써 일부러 올만한 도시는 아니다.

다른 배낭족들이 라벤더향 가득한 프로방스의 중심지 운운하며 애써 낭만을 쥐어짜 읊는 모습을 보노라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보라. 론강을 바라보는 저 청년의 따분한 표정을...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날이 있다.

그리고 이 심심한 속빈 강정 같은 동네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생명이 넘치는 난장판이 될 때가 있다.

바로 매년 7월 딱 한달동안 펼쳐지는 아비뇽 연극제이다. 거리에는 공연하는 사람, 공연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주변도시들까지 숙소가 꽉꽉 들어찬다. 이미 출국 두달전부터 하루 40유로 이하의 싼 호텔은 예약이 다 찬상태였으니,

그보다 더 싼 호스텔에 남는 침대가 있다는건 기적이라고 봐야 한다.

이 마당에 방을 구했으니 정말 다행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득달같이 달려온 아비뇽의 호스텔은, 여태 본 숙소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여지껏 보아온 숙소들은, 공식 유스호스텔이든 사설 호스텔이든

보통은 건물 한두층을 쓰는 곳이 대부분이었고,

잘 해봐야 건물한동을 통째로 쓰는 곳이 한두군데 있었는데,

이곳은 운동장이라고 해도 될만큼 넒은 마당에 건물 서너동, 심지어는 수영장까지 딸려있었다.

가이드북에 나온 약간 비싼감있는 가격대도 감수할 만한,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시설이다.



리셉션이 잠겨 있는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좋다.

리셉션이 잠겨 있는 것만 제외한다면. 잠겨진 리셉션..



그렇다. 울랄라울랄라 하며 호들갑스런 영어인지 프랑스어인지로 날 기다리겠다던 그 아줌마가 있어야 할 리셉션에는 아무도 없고, 굳게 문이 잠겨 있다.



수영장의 수영하는 아이들에게도 물어보고, 그 넓디 넓은 호스텔을 샅샅이 뒤져보지만,

스텝은 커녕 스텝이 키우는 고양이새끼 한마리 눈에 띠지 않는다.

머리가 가렵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입맛을 쩝쩝 다신다. 여행 30일째,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야간열차에서 편히 자지 못한 피로와, 7월의 더위에 신경이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던터에

짜증이 산더미처럼 몰려온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라면, 고함을 버럭 내지르며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버릴텐데..

뭐하는 친구들인지 모르겠다. 아니 아무리 싸구려 호스텔이라지만

이건 엄연히 도시를 대표하는 서비스업이고, 불특정 다수인 손님을 상대로 하는 장사인데,

밥 먹으러 간다 똥 싸러 간다 라는 메모 한장 없이 리셉션이 사라지면

나 같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이놈의 것들은 기본이 안되어 있다.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헤드셋에서는, 메카트니의 Mother Marry가 렛잇비 렛잇비 하며 마음을 달랜다.

침착해지자. 침착해지자. 난 여행 경험 30일차 관록의 배낭족이다. 침착해져야 한다. 무덤덤해지자.

지들이 가봐야 어디를 갔을라고. 기다리면 된다. 기다리자.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배낭을 벗어 리셉션 앞에 주저앉아 하염 없이 기다리기 시작한다.



햇살, 새소리, 수풀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 수영하는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

2시간. 2시간을 기다렸다.

한계다. 못해먹겠다. 더는 못 기다리겠다. 아직까지 아비뇽시내는 구경도 못해봤다.

숙소도 정해지지 않은채 17킬로그램짜리 배낭을 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은 넌센스다.

한계다. 터질것 같다. 터질것 같다...



나는 여행경험 30일차 관록의 배낭족인데..

집어치우자, 집 떠난지 30일 되는 사람들 여기에 수두룩 빽빽하다.

경험 같지도 않은 거 갖고 자위할것도 없다. 분통터지는 상황이니 분통 터트려도 된다.

대책이 없으니 다만 앞이 캄캄할 뿐.



만약에 내가 정말로 경험 많은 배낭족이라면, 한비야누님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아니 한비야누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볼 것도 없다. 아무집이나 들어가서 불쌍한 표정 지어가며 손짓 발짓으로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간청하고, 그게 또 먹혀서 그집 어린 딸이랑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웃고 떠들며 신나게 놀다가는

다음날 아침 식사도 융숭하게 대접 받는것에도 모자라,

맘씨 좋은 주인내외가 보통 관광객은 웬만해서는 찾아내기 어려운 아비뇽 시내

구석구석을 친절히 구경시켜 주겠지..



현실에 순응하자. 나는 그 아줌마가 아니다. 그렇게는 도저히 못하겠다.

우리 집안이 그래도 명색 청도에서도 알아주는 양반집안인데 그렇게까지 들이대느니

차라리 거지처럼 아무데서나 자는 것도 괜찮…

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그렇다. 노숙, 까짓거. 예수님도 마굿간에서 태어났댔지.

제 아무리 이스라엘이라도 12월 25일이면 꽤 추웠을텐데,

지금은 한여름인 7월이고 여기는 지중해가 지척인 남부유럽이다.

내가 예수님보다 위대할건 없다쳐도, 적어도 만삭의 성모마리아보다는 건강하다.

한겨울에 마굿간에서 애도 낳는데 한여름에 하룻밤쯤 자는거, 마굿간이 아니라 길바닥에서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자기네 나라에 돈쓰러 온 손님을 두시간도 넘게 기다리게 하는 이런 몰상식한 놈들에게

울 부모님이 뼈빠지게 번 돈을 쥐어줄 수는 없다.

노숙이다. 나도 노숙이라는거 한번 해보자. 이것도 도전이고 경험이다.

정말이지 별걸 다 하게 되는구나.



생각의 변화가 흥분을 불러온다. 다리에 힘이 난다.

들뜬 기분으로 아비뇽역으로 돌아가서 유인 짐보관소에 배낭을 맡겨버리고,

아비뇽 시내로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타박타박....























7월의 아비뇽 거리는 조그마한 도시 어디에서나 사람들로 가득하다.

주로 선보이는 공연 장르는 연극이지만, 정통연극 말고도 뮤지컬이나 무용, 서커스에

시, 미술, 비디오아트, 마술쇼까지 폭이 넓어지고 있단다.

하지만 클래식이나 오페라는 아직까지 공연되고 있지 않은데,

클래식이 고루해서가 아니라 오랑주나 엑상프로방스 처럼 클래식을 공연하는 

인근도시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란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공연들을 크게 둘로 나누자면 연극제 주최측이 공식적으로 선정하는 실내공연 in이 있고,

길거리 곳곳에서 자리를 깔고 공짜 연기를 펼치는 비공식부분 off가 있다.



돈 안드는 off 보다는 in이 여러가지부분에서 훨씬 더 뛰어나니 10유로쯤 돈을 들이더라도

기분 내키는 공연 아무거나 하나 골라서 들어가 보는게 좋다던데,

나는 사방에서 벌어지는  off들을 쫓아다니며 구경하기도 벅차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하는 생각으로 in 팜플렛을 한 부 얻어다 펼쳐보지만,

팜플렛 내용부터가 도통 알아 볼 수 없는 프랑스어로 되어있다.

여기가 프랑스 땅이니 당연히 연극대사도 프랑스어로 떠들어댈텐데,

남들 다 와하하하면서 즐겁게 웃는데 혼자 못 알아들어서 멍하니 눈만 껌뻑이고 앉아 있게 된는건 싫다.

딱 하나 찾아낸 판토마임공연은 또 하필 오늘이 쉬는 날이니, 어쩔 수 없다. in 포기. 돈 굳었다.





























안전하다. 팔에 어깨끈을 둘둘 감은채 보조가방을 베고 누웠고, 큰 배낭을 맡긴

유인 짐보관소는 아예 강철셔터가 내려져있다.

축제기간이라 역 앞 처마 아래에 누은채로 시내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경찰만 서넛은 된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 주변에는 시끄러운 친구들도 없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기만 하면 된다.

눈을 뜨면 아침일거고, 툭툭 털고 일어나서 기지개 한번 쫙 피면 된는거다. 젊었을 때 한번쯤 해 볼만한 경험이다.

이런 경험을 해 볼 기회를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피곤한 하루였다.

몸이 가라앉는다. 잠이 들려한다. 좋은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왼쪽손은 가랑이 사이를 지나 오른쪽 엉덩이를 긁고 있고,

오른손은 오른쪽 발목을 긁고 있다.

사진 찍으면 예쁘겠구만. 원숭이짓 제대로 한다.



모기다. 검은 배에 흰색 가로줄이 선명한 망할놈의 '아디다스모기'는

군시절에도 소가죽 군화를 뚫고 내 피를 빨더니만

이번에는 지구반대편까지 따라와서 여행을 망쳐놓고 있는거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철두철미하게 준비한 여행이었다.

이른바 모기약 3종세트랍시고,

버물리는 물론이거니와 홈매트에, 바르는 모기차단제까지 가져왔다.

그리고 그 잘난 모기약 3종 세트는 배낭속에 넣어져,

지금 철문이 굳게 잠겨진 짐보관소 안에서 점잖게 잠들어 계시는 중이다.



한시간 동안, 다섯방을 물렸다. 산술적으로 계산해서,

일곱시간을 이러고 있는다면 서른다섯방을 모기에게 당해야한다는 뜻이다.

기억을 찬찬히 헤집어봐도 지난 25년간,

하룻밤 사이에 열방 이상 모기에게 헌혈해 본 본 기억이 없다.

서른다섯방이면, 모르긴 해도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판단력이 흐려지고 있었다.

한비야누님이 달리 철면피였을까.

극단적인 상황에서 달리 선택할 카드가 없으면 누구나 철면피가 되리라.

자존심이니 양반이니 다 필요 없고, 마굿간이라도 좋으니,

벽과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재워만 달라고 사정할 요량으로 다시 호스텔로 찾아갔다.







한밤중에 한국 공연팀들이 홍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것 같던데..

잘 부탁하면 그네들의 숙소에 끼여서 하룻밤 신세 질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그러지 못한다.

평소에는 그렇게 잘 들이대더니 원…



밤 11시 30분. 불은 다 꺼져있고, 리셉션은 여전히 닫혀있다.

더 이상 앞 뒤 가릴 것도 없다. 널찍한 호스텔의 구조는,

아까 직원찾아 삘삘 헤맸던 탓에 훤하다.



창고로만 쓴지도 꽤 오래 되어 보이던 강당에 숨어들어가서,

다음날 아침 8시까지 꿈도 안꾸고  뻗어버린다.







아침에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공용샤워실에서 이 닦고, 머리도 감고,

화장실에서 묵은 변도 내려주고,

차마 식당에 가서 아침까지 먹지는 못하고 기분 좋게 나왔다.

따땃한 아침햇살이 론강 물줄기를 맞아 산산히 부서진다.







잘잤다. 돈 벌었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09-04-19 09:54:36 불펜 게시판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