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형님이나 디에고나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우리가 뭔가를 공유하는 ‘같은사람’이라는 소속감을 느끼기는 힘들었어.

계속 그 사람들하고만 있다가는 한국어 혼잣말 반, 영어 반이 나오면서 폼이 참 우습게 되었을거야.

이래서 우리말 지키려고 그렇게들 애쓰는 거구나.

한 나라에서 같은 말글을 쓰면서 같은 문화 속에서 자라오던 사람들이 이래서 필요한거구나.















맞아. 상기가 그랬었지. 혼자 살아보니 힘들다고.

힘든다는게 이런 뜻이었구나.

주변에 같은 나라 사람이 없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외롭다는 말이었구나.

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시키야 어학연수를 하려거든 한국사람 냄새도 못 맡는 깡촌으로 가서

아예 그 동네 사람이 되어야지. 여기까지 와서도 한국애들이랑 어울리면 뭐가 되냐?"

라고 갈궈줬었는데. 이제 와서 새삼 미안해지네. 니 마음 이제 잘 알겠다고 엽서 한 장 사다 써 붙여 줘야지.

에펠탑 야경이 근사하게 찍힌 놈으로.

아니지. 상기라면 에펠탑 보다는 물랑루즈에서 캉캉춤 추는 무희들 사진을 더 마음에 들어할거야.







아니야 아니야. 부질 없어. 부질 없어. 지금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여기는 유럽의 한 가운데인데. 빠리인데. 빠리에서도 무려 아멜리에의 몽마르뜨인데.

오늘은 머리에도 신경 좀 써 줬는데.

샤틀레레알지구에서 60유로나 주고 멋쟁이 카고 바지도 샀는데.

바지 사면서 확인한거지만, 천예의 단식원 스코틀랜드에 있으면서 허리도 2인치나 줄었는데.

이렇게 언덕 꼭대기 계단에서 앉아 있은 지도 한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계단 아래로 한국 배낭족들도 간간이 눈에 들어오는데 왜 내게는 눈길 한 번 주는 사람 없을까.















몽마르뜨에 오기만 하면, 산뜻한 웨이브 머리 아가씨가 톡 튀어나와서

"안녕하세요. 제가 바로 여행을 하면서 만날 색다른 인연이랍니다.

이렇게 만나려고 제가 여기서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는지 몰라요.

정말 많이 기다렸어요. 우리 그럼 이제, 이 뒷편에 있는 광장 화가들한테 가서 같이 초상화 그려요.

저녁은 제가 상젤리제의 레스토랑을 봐 둔 곳이 있거든요.

괜찮으시다면 거위간 요리를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

대신 와인은 중현씨가 한잔 사셔야 해요.

전 와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이것 저것 많이 가르쳐 주세요.

자 그럼, 어서 가요."하고 팔짱 끼면서 말을 걸어 올 줄로만 알았는데,

아, 그러고 보면 나도 무척 찌질한 인간이구나.















아니다. 한국말 걸어오는 사람이 있긴 했었지 참.

지하철 역에서 여기까지 올라오는 길에 행운의 끈을 걸어주겠다면서 손가락 보여달라는 흑인친구들.

여태 이곳 사람들은 다들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로 물어 왔었지

한국사람인줄 알아보지는 못 하더라마는.

그 친구들 맨날 상대하는게 동양인 배낭족이니까 한중일 세 나라 사람을 알아

보는 연륜도 쌓은거겠지.

백배에서 설명하는거랑 어쩜 그렇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지 원.

에펠탑 밑에서는 다른 흑인친구의 열쇠고리를 살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그 녀석이 나보고 니하오라길래 미련 없이 돌아섰었건만,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반가워서 하마터면 덥썩 손가락 내 주고 붙잡혀 줄 뻔 했네.















목 마른놈이 우물 판다고,

말 걸어 오는 '우리 겨레'가 없으면 내가 찾아가야 하는거야.

사실 서로 인사를 안 해서 그렇지 드문드문 한국배낭족, 종종 보이잖아.

여행 중에는 특히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를 가져야 해.

들이대자. 들이대자. 들이대는거야.









자 그럼 누구에게 들이대는게 좋을까.

우선 세 사람 이상의 그룹에게는 안돼.

굳이 여행지가 아니라 어디서든, 한국사람 세 명 이상이면

이미 그 안에서 리더와 조언자, 분위기 메이커, 그리고 그냥 가만히 따르는 사람 같은

역할 분담이 끝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내가 들어가게 된다면, 불청객으로서 눈총을 받는 역할이 맡겨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

선입견일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걸로는 모험하지 말자.

이 먼데까지 와서 만에 하나라도 동포한테 왕따 당하면 얼마나 서럽겠냐.









그렇다면 현실적인 방안은 둘이나 한 명을 포섭해서 그룹을 형성하는 쪽이겠구나.

그래 둘씩 다니는 사람들, 혹은 혼자 다니는 친구를 잡자.







커플에게 괜히 끼어봐야 피차 좋은 일 안 생길 테니 남녀 한 쌍은 배제하고.







남자 둘도 상관 없어. 셋이 친구 먹고 같이 다니면 돼.

프랑스가 또 삼총사의 나라 아니겠니. 달타냥!!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해!

















만일 상대가 여자 두 명이라면, 제고 해 볼 여지가 좀 있어.

함께 여행을 다니는 여자 두 명은 그야말로 일신동체야.

여자들은 가끔 좀 그런 경우가 있잖아. 둘이서 뭘 하든 자기네끼리만 있고 싶어하고

다른 어떤 외부 인사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대 놓고 싫은티는 안 내더라도, 내가 같이 있는걸 경계하거나 떨떠름해 하는 사람들이라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보통은 아량을 베풀어서 하루쯤 같이 놀아주는 경우가 대부분일거야.

내가 그리 잘 생긴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흉악한 인상도 아니고,

머리에는 빠닥빠닥 왁스질, 멋쟁이 카고바지에 2인치 감소한 허리라인을 가졌으니

그래도 전체에서 중간은 갈거야.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좀 외롭고 불쌍하게 보이기만 한다면, 그래도 거절 하지는 않겠지.









혼자 다니는 남자라면?

이런데서 남자랑 다니는건 기분이 상하는 일이지만 지금은 좀 특수한 상황이잖아?

볼 것도 없어. 그 녀석도 나 처럼 이렇게 구질구질한 생각하면서 외로워하고 있을터이니.

니가 불쌍하니까 내가 특별히 같이 놀아준다라는 뉘양스를 풍겨준다면,

오히려 내 쪽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아.









하지만 가장 좋은건 역시 혼자 다니는 여자겠지?

무슨 설명이 필요해? 낭만의 도시 빠리인데,

뭐 이런데서 마주친 처녀총각 눈 맞아서 좋아 죽는일이 나한테도 생기지 말란 법도 없잖아?

그래, 참한 처자 한 명 꼬셔다가 샹젤리제 가는거야!!



















자, 저기 봐! 벌써 한명 왔어 왔어!

맙소사, 게다가 미인네. 얼굴이 예쁜데, 보통 예쁜게 아니고 심하게 예뻐.

아주 그냥 선녀야. 천사야.

만약에 학교였으면, 우리과였으면 단연 퀸을 먹었을만한 얼굴이잖아.

저 정도면 간이고 쓸게고 다 내 줄 수 있어.

우와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예쁘다..

귀엽고.. 똑똑해 보이고.. 아유 그냥 콱 깨물어 버릴라..











그런데, 겨우 나 정도 되는 인간이 과연 저런 고귀한 여자분이랑 뭐라도 같이 할 수가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내가 어떻게 저분께 말이라도 걸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

이런, 가슴이 두근두근 질할발광을 하는게 도통 진정이 안돼.

우황청심환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이거 정말 어떡한담.











휴. 정신차리자. 용기 있는자가 미인을 차지하나니.

지금이 아니면 내가 어디 가서 저런 애랑 말이라도 한번 섞어 보겠냐.

에라. 눈 질끈 감고 가는거야! 큰일을 할 사람이 이런 간단한 말을 못하냐?

저기요?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시죠? 쉽잖아.

자 중현아! 사나이잖아! 학교 다닐 때  반장도 한 번 해 봤잖아! 할 수 있어!! 가자!!















꿀..꺽...















뭐.. 뭐라고?  으갸아아아아...

















가만, 가만, 숨 좀 돌리자. 갑자기 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네.

참.. 한심하다 이중현. 기대한 반응이 아니라고 아무 말도 못하고 버벅거리다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도망쳐올 것 까지야 없었는데..

이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내 뺄줄이야. 으이구 병X아…











그.. 그 여자가 나한테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이 캔 낫 언더스탠드 유 세이 라고?

내 말을 이해하지 못 한다는 뜻 같은데?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건, 한국말을 못한다? 한국배낭족이 아니다?

그럼 뭐야 영어발음이 어색한게 동양계 미국인은 아닐테고,

예쁜데다 덧니도 없는걸 보니 일본인 같지도 않고,

그럼 중국인? 장쯔이 사촌 동생 쯤 되었으려나?













아무튼 아까까지 앉아 있던 샤크레쾨르 사원 앞으로는,

쪽팔려서라도 다시 돌아갈 수 없겠구만.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온통 그림 그리는 사람들 인데?

아하, 여기가 바로 몽마르뜨의 명물 예술인의 광장 떼르뜨르구나.























요즘 거리의 화가들한테 대세는 몽마르뜨가 아니라 남쪽의 몽파르나스라더니,

화가의 거리를 보려면 몽파르나스로 가라던데,

여기도 아직 그림 그려 주는 사람 많네 뭐.

휴.. 하지만 결국 여기서 같이 초상화 그리자는 사람은 못 만나고, 여기서도 혼자가 되었네?

인생이 원래 그런거지 뭐,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거야.. 친구 필요 없어. 돈이 최고야!!!'














































2006년 7월 1일. 프랑스 빠리 샹젤리제.











루이비통 매장 앞을 혼자 서성이면서 눈물 글썽이는 저를 주워다가,

홍합요리 사다 먹여 주시고, 말 많이 시켜 주시고, 여행 잘 하라고 토닥여 주신

누님들 두 분. 감사드립니다.

정말 복받으실거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