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무원은, 애타는 목소리로 브리헤를 연발하는 나를 보며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윽고 ‘브리쥬?’라고 되묻는다.
“예스! 브리쥬! 이즈 디스 트레인 고스 투 브리쥬?”
“브리쥬? 예스. 고 어 헤드. 유 니드 투 허리.”
내가 올라타자 마자 문이 닫히고 기차가 바로 출발한다.



브뤼셀에서 브리헤로 떠나는 열차는 거의 30분에 한번 꼴로 자주 다니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쓸데 없이 시간을 낭비할 뻔 했다.
역무원이라도 브리헤라고 말하면 못 알아 듣는구나.
브리쥬라고 해야 하는구나.








벨기에는 고작 경상북도만한 영토에서도 두개의 다른 언어와 문화를 쓰는 사람들로 나뉘어져 있다.
브뤼셀을 포함하여 프랑스어가 주로 쓰이는 남부의 왈롱지방에서는
Bregge를 Bruges라고 쓰고, 브리쥬라고 발음한다.



네델란드어를 쓰는 북부의 플라망 사람들의 발음을 우리말로 표기하자면 브리헤가 되기는 하는데,
가이드북에 나온 그대로 [브,리,헤]라고 말하면 이곳 사람들도
눈치가 여간 빠르지 않은 이상 알아 들어 먹기 힘들어한다.



억지로 활자화 하자면 [브리ㅋㅎㅔ]라고나 할까.
빈에서 만난 네델란드 친구에게서 나중에야 배운거지만, 프랑스어의 R발음으로 흔히 알려진,
ㅎ을 발음할 때의 입 모양으로 혀 안쪽 깊숙한 곳에서 그르르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 것이 제대로 된 발음법이다.
브리흐크르흐헤~ 한국어에는 없는 발음을 억지로 표기한 배낭족의 바이블 백배가
한국 배낭족들을 이상한 발음을 일삼는 동양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냥 브리쥬라고 부르는 쪽이 속 편하다.































예쁘다.
브리쥬는 곳곳으로 물자를 운반하던 운하가 실핏줄 마냥 관통하고 있고,
50여 개의 다리들이 골목을 연결한다.
브리쥬라는 어원부터가 ‘다리’라는 의미이라 한다.
운하와 떼어 놓고 생각 할 수 없는 이곳을 더러 벨기에의 암스테르담,
혹은 북구의 베네치아라고도 부른단다.
운하가 멋지지 않다는건 아닌데, 극단적으로 말해서 기껏 고작 도랑 파놓고 배 좀 띄운걸 가지고
바다 한가운데다 도시를 만들어 놓은 베네치아와 비교 하다니,
베네치아 입장에서는 억울해 할 만한 일인 듯도 싶다.
하여간 도시 어디서나 물이 흐르고, 작은 배들이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정말 운치 있다.



















브리쥬를 구경하려면 다들 자전거를 빌려서 타고 다니는 방법을 추천하던데,
당장 주변에 있는 자전거 대여소도 당장 눈에 띠지 않고,
게다가 자전거를 타면 사진을 마음대로 찍기가 힘들 것 같다.
광장에서 만난 두 영국 숙녀분들과 함께 큰 맘먹고 도합 30유로짜리 마차에 오르기로 한다.
마차를 타고 다니며 이런 저런 설명을 들은 다음, 두 발로 걸으면서 정치를 느끼면 된다.

























이런 소도시에서는 굳이 ‘무슨무슨 성당으로 가려면 몇 블록 앞에서 왼쪽으로 꺾었다가..’
하는 식으로 지도를 파헤쳐 가며 머리 아파 해야 할 필요가 없다.
마차도 한번 타 봤겠다 도시의 규모와 길이 대강은 파악 된 상태다.
예수님의 성혈이 있건, 말건, 사진도 찍지 못하게 하는 성당은 멀찍이 제쳐두고,
혼자서 브리쥬 곳곳을 마음대로 배회하는 자유를 느껴 본다.













도시를 한 바퀴 빙 돌면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고요한 수녀원이야말로
도시라 부르기에는 너무 소박하고, 마을이라 부르기에는 또 너무 큰 브리쥬 여행의 끝머리를 장식한다.
여행객들이 바글거리는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머리가 어질어질 했었는데,
과거 십자군 원정으로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모여 살았다는 베긴회 수녀원 안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벨기에 하면 또 초콜릿이다. 이 보기 민망한 초콜릿은,
폭정을 휘두르는 영주 남편에게 세금을 낮춰 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누드라는 상식을 깨는 대처방법을 제시한 역사상 최초의 노출증 환자 고다이버 부인을 나타낸 것이다.
몸매만큼 뛰어난 부인의 성품을 높이 평가하여, 고다이버의 알몸을 한 조각 사서 쪽쪽 빨아 먹어준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에서는 맛 볼 수 없었던 걸쭉하면서도 혀에 착착 감기는 맛이 있다.
몇몇 제과점들을 돌아 다니면서 사 먹은 조각 초콜릿들의 맛이 다 조금씩 다르다.
고다이버의 이름을 딴 고디바 초콜릿이라는 유명한 벨기에산 초콜릿 상표도 있지만,
공장에 팔아 넘기기는커녕 며느리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는
가문만의 독특한 초콜릿 제조 비법들을 간직한 곳도 있긴 있나 보다.






브리쥬에서 보낸 몇 시간은 아주 좋았지만, 브뤼셀로 돌아와 보니 별 시덥잖은 일 때문에
쓸데 없는 피곤함을 겪는다.



‘유럽 백배 즐기기’가 문제였다. 2005년까지 백배에 실린 지도는 ‘유럽 백배 헤매기’라는 악명이 붙을 정도로 개판이었다.
해마다 개정판이 나올 때 마다 많은 진전을 보이고는 있지만,
2006년 현재에도 고쳐야 할 부분들이 여전히 조금씩은 눈에 들어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여 배낭족들에게 당당히 판매율 1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미워도 백배’라는 말 또한 당분간은 계속 설득력을 얻을 듯 싶다.








어깨를 꽉꽉 짓누르는 배낭을 짊어지고 유스호스텔을 찾아 한시간을 넘도록 헤매는 일은 결코 상쾌한 일이 될 수 없다.
역으로부터 어정쩡하게 떨어져 있는데다, 오줌 냄새와 낙서, 쓰레기더미를 헤치고 찾아가야 하는
불친절한 위치도 바람직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찾아가지 않을 것을 걱정한 두려워한 건지
훨씬 더 좋아 보이는 엉뚱한 지점에다가 숙소 위치를 표시하다니.
이것이 바로 ‘백배 헤매기’다.
















‘실물크기’만도 못한 오줌싸개소년을 보니 정말, 기도 안 찬다.
보 잘 것 없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헛웃음만 나온다.
이런걸 갖다가 국가의 상징이라며, 벨기에를 방문한 각국 원수들에게
오줌싸개소년에게 입힐 옷을 선물로 받아 챙기는 그 포장술이 대단하다.
으슥한 골목 구석에 있다는 오줌싸개소녀는 차마 찾아 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내가 가진 지도는, ‘백배 헤매기’니까.
















초콜렛 만큼 유명한 벨기에산 와플은 보기에는 예쁘지만, 내 입맛에는 너무 달다.



















그랑쁠라스에서는, 포르투갈 친구들이 월드컵8강에 올라갔다고 떠드는 소리가 귀에 몹시 거슬린다.
지난번에 우리나라한테도 진 주제에. 우리도, 심판이 핸들링을 핸들링이라고만 봤다면,
오프사이드를 오프사이드라고만 판정 했었다면,
지금 나도 여기서 오 필승 코리아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기분이 언짢다.








급기야, 푸줏간 거리에서는 거지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룬다.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서 렌즈를 갈아 끼우는 모양새가 돈이 많은 일본인쯤으로 봤나 보다.
하루 종일 걸으면서도 초콜릿이니, 와플이니, 감질나는 것 밖에 안 먹어서 피곤한데.
나도 저녁식사라고 해 봐야 슈퍼에 가서 대충 때워야 하는데 생각에 짜증이 솟구쳐
구걸하는 손을 확 뿌리치고 돌아서 버린다.




슈퍼에서, 바구니에 바게뜨 빵과 바나나를 가득 담아서 계산대에 줄 서 있으려니 참 서럽다.
내가 이렇게 먹고 다니는걸 본다면, 그 거지아저씨도 차마 나한테 돈 달라고 사정은 못했을 텐데.



하지만 부모님이 아끼고 아껴서 보내주신 여행인데,
철 없이 풀풀 써 지르고 다니는 장면도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닐 거다.
그래서 나는 내 바로 옆에서 노릇노릇 구워져서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4.5유로씩이나 하는 통짜 바베큐 치킨도 안 먹으려고 참고 있는 것이..
잠깐만, 4.5유로면 6천원. 한국에서도 양념통닭 한 마리 만이천원인데 딱 반 값이다.
6천원 주고 닭 한마리 사 먹는걸 가지고 과소비니 돈질할이니 할 사람은 없다고 본다.
입이 헐 정도로 딱딱한 바게뜨 따위 던져 버리고, 가장 커 보이는 녀석을 한 마리 집어 들었다.




한국이 아니라서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이 7월초니까 대강 초복 언저리가 아닐까.
복날과 상관 없이, 그 동안 고생했다. 몸 보신을 해 줄 때가 되었다.









사람이란 간사하면서도 우매한 동물이라서 마지막이 좋으면 다 좋은 줄 안다.
그리고 나는 배만 부르면 만사가 오케이다.
세상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불평 불만도 없어지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만족하게 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시험에 합격해야 하고 미녀를 꼬셔야 하고 비싼 차를 모는 등의 방법이 있지만,
다 필요 없고 그냥 맛난 것을 배 부르게 잘 먹기만 해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돈도 덜 들고, 또 아주 쉽다.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서, 뜨거운 물에 샴푸 풀어 머리 감고, 샤워하고,
닭 한 마리를 혼자서 꾸역꾸역 다 밀어 넣어 준 다음,
불룩해 진 배를 두드리며 침대 위에 누워서,
일기나 끄적이다가 기분 좋게 잠들어 버리면 된다.
힘든 하루였지만, 마지막을 기분 좋게 마무리 짓는다면
벨기에에 대한 전반적인 기억들이 좋아 질 거다. 그러면 된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아까 매정하게 뿌리친 거지 아저씨를 다시 만난다.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며 피하는 거지아저씨 앞에 서서, “아까는 미안했어요.”
하고 한국말로 싱거운 사과를 한다.
봉지에서 바나나를 세 개 꺼내준다.
하나만 주면 정이 없다고, 두 개 주려고 했건만 하나가 더 따라 나와 버렸다.








거지아저씨가 웃는다. 나도 웃는다.
옆에서 지켜 보던 있던 경찰도 웃고 오줌 싸개 소년도 웃는다.
벨기에가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