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라는 곳은, 계급과 서열이 극도로 중시되는 특수한 사회이다보니

이른바 '짬밥'을 무기 삼은 상사가 휘두르는 벼라별

불합리한 횡포에 시달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고,

반대로 부하에게 내가 갖은 전횡을 부리게 되는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자신의 일을 떠넘기는 일이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보초를 서는 '소초경계근무'에서,

새벽녘에 고참병이 초소 안에 들어가서 모포를 깔고 퍼질러 자게 되면

불쌍한 이등병은 어디 하소연 할데도 없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무거운 총을 들고

꼬박 서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진부하기까지 하다.



남자라면 누구나 다녀오는 것이 군대다.

본의 아니게 '공익'이라는 혜택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어쨌든 그들도 기초적인 군사훈련은 다 받으며 잠시 잠깐이나마 군인신분을

한번씩은 다 가져 보게 된다.




나 또한 저런 비인간적인 집단 속에서 허우적거렸었고,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 그래도 내가 선임에게 당한 만큼 보다는

후임병을 덜 괴롭혔다는 어정쩡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세계에서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

룩셈부르크에서도 자행되고 있을 줄이야..











우리네 경복궁 덕수궁 수문장은 계약직 단역배우나 공익근무요원이지만,

룩셈부르크 대공궁을 지키고 있는 저 경비병은 진짜 군인 맞다.

베르사유와 바티칸의 경비대원이 전통적으로 그들에게 목숨을 바쳐온 스위스 용병이듯,

저들도 룩셈부르크 정규군 중에서도 최정예를 가려 뽑아다 저렇게 배치한 것이다.

저 군인이 들고 있는 오스트리아산 AUG-슈타이어 소총 또한 진퉁 살상병기이다.













흠. 탄창이 방아쇠보다 뒤에 위치한 '불펍'방식.

뜬금 없는 총이야기를 하자면, 저런 방식이 총신의 길이는 줄이면서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무게중심이 뒤쪽으로 몰리는 구조라 충격에 약하고, 백병전에 불리하다.

산악에서의 백병전이 잦을 수 밖에 없는 우리나라실정에는 맞지 않아서 들여오지 않았댄다.





유럽에 평화가 찾아든 꽤 오래 전부터,

경비병들은 궁전 앞을 지키는 본래의 목적 대신

관광자원의 일종으로 전락한 상태이다.

만일 누군가가 궁 앞에서 깽판을 친다면 과연 저 친구들이 나설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경찰이 튀어나와 불한당을 잡아가게 될지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궁의 정문 앞은,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아래에서 경비병 한명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열심히 경비를 서고 있었다.

어깨에 달린 계급장은 빨간 갈매기 하나. 이등병이다. 쫄병이다.













가만히 서 있다 어깨를 틀어 궁 앞을 각을 딱딱 맞춰 걷다가,

총을 고쳐 쥐고 다시 가만히 서 있기를 반복한다.

미동도 하지 않으며 마냥 꼿꼿하게 서 있는 것 보다야 조금 더 낫겠지만,

저 정도만 되어도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먹고 살기 참 힘들다.

룩셈부르크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나라이니 만치 돈이야 많이 받겠다만,

예비역 아저씨들이 ‘군대 다시 가라면 자살한다.’라는 과격한 말을 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수고하세요.”하는 싱거운 한국말 인사를 남기고, 궁 뒷편으로 돌아간다.











뒷문의 나무그늘에서 어슬렁거리는 또 다른 한명의 경비병을 본 순간,

직감적으로 그 친구의 어깨를 쳐다본다. 아니나 다를까, 갈메기가 셋.

상병 아니면 병장이다.

이 친구는 총도 들지 않고서 이따금씩 시계도 쳐다봐주고,

내 카메라도 퍽이나 의식하면서 고참의 여유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고참 경비병은 자신과,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계급장과 눈이 마주친 내가

지난 군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푸흡!”하고 웃는 것을 영문도 모르는채

아주 고까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댁도 졸병시절에는 저쪽 정문에서 힘들게 서 있었겠지.

군생활 보람 있게 잘 보내고, 밑에 친구 너무 괴롭히지 마쇼.

내가 누구냐고? 나도 병장이야. 근데 난, 예비역이야. 제대했거든.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어. 안녕.













프랑스와 독일, 벨기에와 네델란드를 연결하는 지리적 위치는

룩셈부르크를 유럽 안의 또 다른 화약고로 만들었다.

드라마 밴드오브브라더스에서도 독일군이 점령한 룩셈부르크의 바스통을

탈환하려는 연합군의 이야기가 그려진 적이 있다.

사방에서 쉴 새 없이 몰려드는 무수한 침입들을 막아내기 위해

300미터 높이의 절벽 아래에서부터 쌓아 올린 유럽 최강의 요새 보크 포대가,

오늘날에는 국가를 대표하는 볼거리가 되었다.

















포대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하일랜드처럼 광활하거나 빠리처럼 우아한 맛은 없지만,

그 나름대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멀리 있는 선로위로 기차가 달리는 모습이 들어간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구도자의 자세로 가만히 기다려야만 한다.

동행이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야.



















룩셈부르크에서만 볼 수 있는 걸어 다니는 고객만족. 미스터앤 미시즈 인포메이션!

Ask me라는 글귀가 참으로 편안하고 친근하다.

멀찍이서 택시 부르듯 ‘어이 인포메이션!!’하면

‘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하고 다다다 달려올 것만 같다.



물론, 불러 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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