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유럽 2006] 제 23탄. 스트라스부르 : 마지막 민족
스트라스부르역 구내에는 ‘이중현 선생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라고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빠리에서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취리히까지 특급열차 떼제베가
2007년부터 운행된다는 내용으로 짐작 되는 불어를 보니 괜한 심술이 난다. 
오밀조밀한 목조건물들이 가득한 도시 가운데로 작은 운하가 흐르는 스트라스부르는,
스코틀랜드나 룩셈부르크와 마찬가지로 교통이 불편한 탓에
그 동안 여행객의 발걸음을 비교적 덜 받아 왔던 곳이다.
내가 이 곳에 온 이유 중의 하나가, 일단 한국 배낭족이 많이 가지 않는 곳이라서
나중에 ‘남 다른 여행’이랍시며 우쭐댈 수 있을거라는 상당히 옹졸한 취지였다.
‘에이 프랑스에서 갈만한 데가 빠리랑 니스만 있는게 아니예요.
제가 스트라스부르를 갔었거든요. 스트라스부르가 얼마나 멋졌냐면..
아, 거기가 어디냐구요? 룩셈부르크 밑이에요.
룩셈부르크는 또 어디나구요? 뭐 그런데가 있어요.
한국 사람들은 잘 몰라서 안가는 곳이죠. 저는 갔었지만.
동네가 예쁘고 참 좋았어요. 군인들 군기도 잘 잡혀 있었구요. 하하하.’ 
그런데 떼제베가 뚫려 버리면, 교통이 편리해지면, 배낭객이 지금보다 많이 몰리게 되면,
그 잘나신 ‘희소가치’가 흐려지게 되는 셈이다.
나는 원래 속이 좁아서 잘 삐진다.
스트라스부르로 떼제베가 다니게 된다는 것은 충분히 배알이 뒤틀릴만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이 곳을 찾은 더 큰 이유가 있었으니 이번만큼은 삐지지 않기로 다짐한다.
스트라스부르가 있는 이곳 알자스 로렌지방이 바로,
알퐁스도데가 쓴 ‘마지막 수업’의 무대였으니까.
"프랑스 말은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분명하며 굳센 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비록 국민이 노예가 된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말을 잊지 않고 있다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독일의 지배 아래에서 더 이상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될 수 없었던 이 지방에서
마지막으로 프랑스어 수업을 하는 모습을 그린 잔잔하고 아름다운 단편소설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공감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역량도 있지만 군사정권이 주입시킨 민족주의도 크게 한몫 했었다고 확신한다.
소설 속의 내용처럼, 이 알자스로렌지방은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치열한 영토분쟁에 시달렸었다.
2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프랑스의 땅으로 완전히 자리 잡기전까지, 20세기 동안 통치권이 무려 17번씩이나 바뀐 피의 땅이었다.
근방의 작은 시골마을로 가면 프랑스어는 한마디도 못하고 독일어만 할 줄 아는 노인들이 꽤 된단다.
심지어는, 2차 대전 때 독일군으로 참전해서 프랑스군과 싸웠는데
지금은 땅 주인이 바뀌어 프랑스인이 되어버렸다고 너털웃음을 짓는 할아버지도 있단다.
원래 나라간에 국경을 정할 때는 큰 강이나 산맥 같은 지리적인 경계를 이용하는 방법이 보편적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북쪽과 서쪽으로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남서쪽의 스페인과는 피레네 산맥,
스위스와 이탈리아가 있는 남동쪽으로는 알프스산맥이 우뚝 서 있어서 경계가 분명하다.
알자스로렌에는 독일과의 국경선이 되는 라인강이 있기는 한데,
말이 좋아 강이지 한강에 비하면 실개천이니 국경 갖고 시비를 걸기에 적당할 법도 하다.
거기에 땅이 비옥하고 날씨가 좋아서 포도 농사를 짓기에 아주 좋고,
철광석이나 석탄 같은 천연자원도 많아서 프랑스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이니 누구나 탐 낼 만한 곳이었으리라.
남북으로 길게 나 있는 포도밭가도에서는 질 좋은 백포도주가 생산되기도 하지만
길 자체도 아름다워서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단다.
우리가 자전거 타고 제주도 일주를 하듯,
이곳 친구들도 일주일가량의 일정으로 자전거 하이킹을 하곤 한단다.
꼴마의 유스호스텔에서 말을 섞게 된 벨기에 친구들은 왜 여기까지 와서
자전거로 경치 구경도 한번 안 해보고 휘리릭 가냐며 의아해 하는데,
‘유럽에 자주 올 수 없다. 시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찍고 턴 한다. 느네 나라 주변으로 놀러 갈 데 많아서 좋겠다.’
라는 말이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애국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마지막수업’과는 달리, 이곳 사람들은 사실 프랑스인으로서 자긍심은 별로 없다.
영토분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까지 이 곳은 중세 이후로 독일어를 사용 해 온 독일 사람들의 땅이었다.
스트라스부르라는 이름 자체가 짤즈부르크, 함부르크, 님펜부르크 같은 독일어식 이름이고,
거리를 가득 메운 예쁜 목조 건물들도 프랑스보다는 독일지방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양식이다.
그러고 보니 이 곳 사람들 등치가 큼직큼직하고 선이 굵은 것이 프랑스계 보다는 게르만쪽에 더 가까운 것도 같다. 
지네 말이 무조건 최고이기 때문에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프랑스 사람들과는 다르게,
외국어의 중요성을 역설한 괴테의 가르침을 받들어 영어도 곧잘 한다.
괴테가 했다는 말이, ‘독일인은 모두가 외국어를 열심히 배워야 한다. 그래야 독일을 찾은 외국인들이 편안해 할 것이고, 독일인이 외국으로 나가더라도 편안할 것이기 때문이다.’였다는데,
확실히 프랑스애들은 이런 사고를 좀 배울 필요가 있다.
알자스의 주민들이 투표에서 독일이 아닌 프랑스를 선택한 것은,
독일이 아직까지 봉건정치에 머물러 있을 때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독일의 봉건통치 하에서 강자에게 지배를 받기 보다는,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시민이 되고 싶어했기 때문이라 한다.
조국의 깃발 아래 국민들의 피를 끓게 하는 민족주의라는 것이
구성원 개개인의 인권 앞에서 노친네 똥고집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원래 민족주의란, 세계시민보다는 자기나라 정권에 충성하는
애국자를 양산하기 위한 이념이라 볼 수 있다.
물론, ‘민족의 정체성’은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우리의 근본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태도의 결정적인 문제는, 자기네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나라의 결점을 들춰서 적대심을 키운다는데 있다.
별로 넓지도 않은 유럽 땅에서 수십 개의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서로 우리가 잘났네 저것들은 못났네 하고 아웅다웅 하다보면 결과는 뻔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포함한 수백, 수천 번의 전쟁 동안
헤아릴 엄두도 나지 않는 사람들이 죽은 후에야,
유럽인들은 배타적이기만 한 민족주의를 반성하기 시작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분쟁지 알자스로렌을, 이제는 독일도 프랑스도
자기네들만의 고유의 터전이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이 곳에 유럽 의회 유럽 평의회, 유럽 인권재판소 같은 기구들을 설치하여 통합 유럽의 수도로 삼았다.
스트라스부르의 학교에서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함께 가르치고 있고,
역사 교과서를 쓸 때도 두 나라 역사학자들이 죄 모여서 긴밀히 협의한단다.
이쯤 되면 또 요 몇 년간 중국과 일본이 고구려와 독도를 자기네 것이라며
어거지를 부리고 있는 우리 극동아시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고유민족인 한족 외에 수 없이 많은 소수민족들로 이뤄진 중국은,
앉으나 서나 소수민족들이 들고 일어나 독립을 주장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국경지대에서 주로 모여 사는 소수민족들이 민족의 고유성을 주장하며
자치권을 인정해 달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하면 국가 자체가 흔들릴 위기가 올 수 있다고 생각 한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중국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 되어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하나’라는 이른바 ‘다원일체론’이다.
그러니까 만주에 있는 고구려 후손들, 조선족들이 우리는 한족이 아니라 조선족이라고,
만주는 중국도 아니라면서 자치권을 인정해 달라고 외치면 난감한 일이 벌어지게 되니까.
따라서, 비록 민족은 하나가 아니지만 중국이라는 하나의 문화를 갖고 있다는
내적통합을 위해, 고구려를 중국 문화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고,
이게 바로 동북공정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이런 갸륵한 성의에 우리가 과연 어떤 보답을 해야 할까.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대박 한류드라마를 아무리 많이 팔아 먹더라도,
그리고 서희 같은 외교관이 나타나서 중국과의 민족대결구도에서 완승을 거둔다 하더라도
만주땅이 우리에게 돌아오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중국이 평양 땅을 차지하기 위해 동북공정을 준비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여기에 똑같은 민족주의로 맞불을 놓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최악의 결과가,
이 내 눈앞의 알자스로렌지방이다.
‘미합중국’에 대항하기 위한 ‘유럽연합’을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다 모으고 합치려 하는 유럽의 경우를,
아직까지 민족의 자긍심을 최고로 치는 한,중,일 3국에 그대로 적용는 것은 무리가 있긴 하다.
하지만, 어줍잖은 민족주의에 기초한 영토분쟁을 끌고 가봤자
좋을 것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이쪽 사람들과 비슷한 코드가 분명히 있다.
땅도 넓고 자원도 많은 미국 보다는, 좁다란 공간 속에서 여럿이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유럽이 그래도 우리가 참고로 할 대상에는 더 가까우니까.
물론 여태 단 한번도 고구려를 계승하려 했던 적이 없다가
단지 정치적인 이유로 남의 나라 역사를 날로 잡수려는 중국의 태도는 물론 부당하다.
북한과 태그팀을 이룬 완벽한 역사 고증을 통해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박아줘야 마땅하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민족주의냐고,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아시아 평화를 위해서 프랑스와 독일처럼
화합하면서 질서 있게 살 수는 없냐고,
꼭 그 들처럼 전쟁이라는 비싼 수업료를 내야 하냐는 비판도 함께 해야 한다.
유럽이든, 아시아든, 극단적인 민족주의는 결국 대립이라는 악순환을 낳는다.
때문에 장기적으로 볼 때 지금과는 큰 폭으로 바꿔나가야 한다고,
최소한의 지킬 것은 지키되 협력적인 국제관계를 다져나가자고 주장할 필요가 있다.
참 21세기 세계 속의 대한민국, 갈 길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