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째. 여행의 근간이 흔들릴만한 야단이 났다.
카메라가 고장났다.
나는 보통 사진을 찍기 위해 크게 세 단계의 순서를 거친다.
(1)찍을 대상을 확인하고, (2)카메라를 갖다대 셔터를 반쯤 눌러 노출과 초점을 맞추고,
(3)반셔터를 누른 그 상태에서 구도를 옮겨 풀셔터로 찍는것이 그 방법이다.

꼴마 운터린덴미술관의 이젠하임 제단화를 찍기 위해
기계적으로 카메라를 들어 반셔터를 눌렀지만,
내 여자친구 300D는 더이상 평소처럼 지잉~하면서 초점을 맞쳐주지 않는다.
멎어버렸다.

그나마 풀셔터를 누르니 노출과 초점을 잡으면서 동시에 철크덕 하고 사진을 찍어버린다.
아까 말한 (2), (3)의 순서가 하나로 줄게 되어 노출과 초점이 맞은 상태에서
구도를 마음대로 조정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크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 먹은대로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를 보니
마치 내 팔 다리가 묶이기라도 한 듯, 갑갑하다.

꼬여도 이렇게 꼬이는구나. 아직 일정의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사진여행에서 카메라가 고장나다니, 
뒷덜미가 띵하다.  앞으로 사진을 더 찍지 못할 것만 같다.
이맛살에 힘이 들어간다.




이젠하임 제단화의 사탄들이 나를 보고 웃고 있는것만 같다.

2년동안 잘 쓰던녀석이 꼭 유럽에만 오니 고장이 나버리는구나.
물론 '여행 동안에는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두개 이상의 카메라 바디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는건
사진 관련책에서 수 차례 봐온 상식중의 상식이긴 하다.
하지만 구닥다리 최저가 DSLR인 300D도 겨우겨우 중고품으로 산 내 꼴에
무슨 얼어죽을놈의 투바디냐 말이다.

골치가 아프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스위스로 가야 한다.
루체른의 리기쿨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며, 스위스행 기차에 올라탄다.













스위스의 풍경은 뭐, 호수가 있어야 예쁨직한 곳에 호수가 있고, 나무와 집이 있어야 할만한 곳에
나무와 집이 있는 동화 속의 예쁜 풍경이라는건 인정하겠다만,
이미 황량하고 척박하고 광활한 남자의 자연,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를 본 입장에서는
이게 유럽 최고의 자연 경관이라는데는 절대 동의 못하겠다.
스코틀랜드를 먼저 간 것이 실수였다.




"영혁이냐. 그래 형이다. 잘 지내냐. 잘 지낸다.
그래. 전화요금 비싸니까 본론만 말하자.
형이 지금 스위스인데 카메라가 고장 났다.
고쳐야 된다. 증상은, 반셔터가 잡히지 않는다. 
아마 셔터박스 수명이 다 한걸로 예상된다.
에세랄클럽이라는데 회원가입해서 질문 올리면 실시간으로 답글이 올라오니까
정확히 어떤 고장인지, 수리비용이나 시간은 얼마나 걸릴지 알아봐줘라.
그리고 여기는 스위스에서도 루체른이라는 도시인데, 캐논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이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캐논 센터의 전화번호랑, 주소도 알아봐줘라.
내 생각에는 아마 취리히나 베른 정도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 시간 뒤에 다시 전화하마.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이상."



영민한 내 친구는 10분만에 내가 부탁한 모든 정보를 해결해줬다.
셔터박스의 문제는 아니고 아마 셔터 회로에 이상이 있는 것 같은데 10만원 내외로 수리비가 나올 것 같다고.
한국에서라면 한시간이면 수리되겠지만 유럽은 잘 모르겠다고.
그리고 찾아보니 루체른에도 캐논센터가 있다고,
주소와 전화번호는 이러쿵 저러쿵이라고.





그러고 보니 여기는 우간다 같은 오지가 아니라
국민소득이 4만불씩이나 되는 선진국 스위스다.
한국 같은 어정쩡한 나라에도 도처에 깔려있는 '캐논 센터'가
스위스 루체른 같이 유명한 관광도시에 없다는게 말이 안된다.
수세기 전부터 시계를 만들어온 초정밀한 사람들이니
이런 싸구려 카메라따위, 금방 수리해내겠지.
다행이다. 다행이다.
수리비 10만원? 80유로? 까짓거 카메라만 고쳐준다면 얼마든지 낼 수 있다.
다행이다.

지도에서 확인해본 캐논센터의 위치는 여행자들이 몰리는
구시가에서 전혀 동떨어진, 신시가지 저쪽편 구석이다.
다행히 여기저기 찾아 헤맬 필요 없이 30분정도 큰 도로를 따라
쭉 걸어 내려가기만 하면 될 것 같다.
괜히 버스노선을 보며 끙끙거릴 필요 없이, 걸으면 된다. 금요일 오후 3시경이었다.





나름 다녀본 경험을 비추어 보건데, 이곳 사람들이 가장 잘 지키는건,
질서...라기 보다는, 휴일이다.
모든이가 오후 5시면 칼퇴근이고,
토요일과 일요일에 일을 한다는건 생각 할 수가 없다.
그저 집에가서 놀아야만 한다.
24시간 편의점 같은건 존재할 건덕지가 없는 동네이니,

두 시간 남았다. 이 두 시간을 놓치면,
수리를 위해 다음주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럴 수는 없다. 어서 내 여자친구를 고쳐야 한다.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한두방울씩 투둑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점 더 거세진다.
카메라에 비 맞히면 안된다. 서둘러야 한다.
반팔티 위에 받쳐 입은 조끼 품속으로 카메라를 꼬옥 끌어안고, 미친듯이 거리를 달린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아파트 베란다의 유리창문을 깨뜨려 다리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나를 안고서,
아버지는 한밤중에 런닝셔츠에 팬티바람으로 버스 두 정거장 거리의
병원 응급실로 내달렸었다. 열일곱바늘을 꿰맸었던가?

'우리집에 있는 똥차 두대 다 팔아도 니 비행기 값도 안나온다.'
라시며 한숨 지으시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나 유치원 다닐 때 백화점에 가서 산 잠바를 아직도 입고 다니시는 아버지..
내 얼굴을 타고 내리는 건 분명 빗물일거다.
빗물인데, 빗물치고는 좀 뜨겁다. 아마도 여름이라서 그럴거다.
망할놈의 카메라.
쓸데 없이 옛날생각하게 만들고 있어.

"여기는 A/S 센터가 아니라 비지니스 센터이다.
미안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수리서비스는 해 줄 수가 없다."

키가 훤칠하고 인물도 아주 좋은 금발 직원은 유창한 영어로 친절하게 나를 좌절시킨다.
Canon Business Center라는 실내 간판 아래로는 전시용 디지털카메라 하나 없었고,
센터내부는 모두 사무원들뿐이다.
내 친구 유영혁. 이 망할놈. 이런데를 가르쳐주면 어떡해..
아무리 공익이라지만 이렇게 개념이 없을 줄이야..

비에 흠뻑 젖은 채 카메라를 부둥켜 안고 헉헉거리며
"오.. 리얼리.." 만 주워 섬기는 내가 퍽도 안쓰러웠는지,
직원은 '대신 당신이 원한다면, 시내의 카메라수리점의 약도를 인쇄해 줄 수는 있다.'
라며 구글어스에서 구시가 근처에 있는
카메라용품점의 지도를 프린트 해 준다.

달갑잖은 표정으로 고맙다고 인사하며 나와 시내의 카메라 전문점으로 가봤지만,
카메라점 직원은 "그거 스위스에서는 수리 못한다. 한 2-3주 걸릴거다.
그냥 그대로 다녀라. 사진을 전혀 못 찍는건 아니잖아?"
라며 속을 뒤집어 놓는다.



사진가들의 로망. 캐논의 풀프레임바디 EOS-5D.
홧김에 돈을 탈탈 다 털고 부모님께 SOS신청을 하여
이 녀석을 질러버릴까라는 위험한 생각도 했다.

애매한 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화풀이를 흠뻑 해주고,
(이 새끼야 수리센터가 아니고 비지니스 센터였잖아!!
그냥 사무실이잖아!! 역시 공익은 @#$%!!)
터덜터덜 비가 그친 루체른 구시가를 돌아다본다.















프랑스 혁병 당시 루이16세 일가를 마지막까지 호위하다 전멸한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빈사의 사자상의 표정에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는 듯 하다



그리고 루체른 구시가에는 조상의 얼을 이어 받은 빈사의 쎄빠뜨가 있다.


심지어, 베른에는 빈사의 곰탱이들도 있다.
으이그 이놈들아….



대부분의 영토가 알프스자락에 위치한 스위스에서,
한국사람이 가장 많이 찾는 여행지는 인터라켄이고,
거기서도 유럽의 최고봉 융프라우요흐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댄다.

내가 인터라켄이 아니라 루체른으로 온 것은 정말 단순하게도,
'인터라켄은 다들 가는데니까'였다.
물론, 루체른에도 만년설로 가득한 융프라우요흐에 못지 않게 멋진 하이킹 코스, 
'리기', '필라투스', '티틀리스'라는 세개의 봉우리가 있댄다.
나는 그 중에서도 '리기쿨룸'에 가서 하이킹을 할 요량이었다.

호스텔 로비에 있는 대형 PDP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나오기는 하는데
정작 화면은 속절 없는 회색으로 가득했다.
회색으로 가득찬 영상이, 사실은 루체른에 있는 각 산봉우리 꼭대기에 설치된
카메라가 쏴주는 일종의 CCTV라는걸 알게된건
호스텔의 애꾸눈 아저씨가 지나가는 말투로 설명해 준 다음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산위에 올라가면 풀과 나무와 집과 산과 호수가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동화속 알프스 풍경 대신, TV에 나오는 그대로
까마득히 아름다운 회색 구름들만이 한눈에 가득 들어온다는 뜻이겠거니.

화면은 이윽고 유럽 전체의 위성사진을 보여준다.
유럽대륙 전체가 구름한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
오직. 시커먼 먹구름이 가득한 스.위.스.지방만 빼놓고.



애꾸눈 아저씨는 알 수 없는 독일어를 친절하게도 영어로 통역해 주는데,
앞으로 2-3일간은 스위스 전체의 날씨가 이모양이란다.

판단과 행동은 항상 신속정확하게 해야 한다.
알프스와 요들송이 아름다운 하이디의 나라 스위스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
주저 없이 다음 목적지인 프라하행 야간열차를 예약해 버렸다.
앞으로의 일정에서도 스위스라는 페이지는 영원히 지워지리라.



전유성 아저씨도 인사동 길한복판에다가 큼직한 장기판이랑 장기말을 만들어서 던져주니 사람들이 좋아라 하며 놀더라는데..



폭발하는 자동차 수요에 맞춰 자동차 전용도로를 넓히는 자동차 우선정책이 아니라,
전동차를 개설하여 도로를 오히려 좁히면서 자동차 수요를 줄이는 
보행자 본위의 표상.
소음도 없고 교통정체도 없는 일종의 전차. 트램.



국민소득이 4만불이면, 택시도 벤츠다.
스위스는 정말 기가 막힌 나라다.





취리히에서 야간열차 출발시간을 기다리며, 호숫가에 앉아 멍하니
비둘기들에게 빵조각을 던져주고 있던 내 앞에 서 있는건
하필 가니메데와 제우스의 동상이다.
그리스 신화를 대강 얼버무리자면 트로이 미소년 왕자 가니메데를,
독수리로 변신한 제우스가 납치해다 신들의 시종을 시켰다는 내용인데,
이 비둘기놈들 중에 변신한 노무현 대통령이라도 있으면 나 청와대로 취직도 시켜줄텐데...
하는 망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