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두더지 같은 김일성이 또 다시 땅굴을 파서 침략의 손길이 뻗칠 수 없도록,
우리모두 힘을 합하여 총력안보 국민총화로 철통 같이 굳게 뭉쳐서,
북녘땅 생지옥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허덕이는 불쌍한 북한동포들을
악랄한 공산당 빨갱이놈들로부터 자유대한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이 어린 연사,






“소리 높여!! 부르으 짖습니다!!!!”



소리 높여 부르짖으면서 나는 눈을 뜬다.
같은 칸에 탄 노부부, 그리고 차장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차장은 전날 맡아둔 여권과 유레일 패스를 돌려주고는,
아침식사라며 빵 두 조각과 커피한잔이 담긴 쟁반을 건넨다.




하품과 함께 엉덩이를 좀 긁고 나니 그제서야 슬슬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수리하기 위해 원래 예정에는 없던 비엔나로 가긴 해야 하는데,
하필 주말이 끼인 탓에 토,일요일 이틀을 스위스와 비엔나의 중간쯤에 위치한 체코에서 보내기로 한 터였고,
그러기 위해서 취리히에서 출발하는 프라하행 야간열차를 탔다가 아침에 잠에서 깬 것이다.




82년생인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하기 직전의,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마지막 세대라 하겠다.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꾸기 직전의 국민학교에서는 반공포스터, 표어, 웅변대회가 계절이 바뀔 때 마다 열렸고,
나도 종종 나가서 가끔씩 상도 타고 그러긴 했다.
하지만 십수년이 훨씬 넘게 지난 지금, 고작 동유럽행 열차를 탄 것 가지고 대뜸 초등학교 3학년 때 나간
교내 반공웅변대회 꿈을 꿀 것 까지는 없을텐데.
신경이 많이 예민해져 있었나 보다. 카메라가 고장난 영향이 참 크다.
















아닌게 아니라 프라하로 가기 전, 체스키 부다요비치에서 내려 역 앞의 전경을 보니 기분이 멋쩍다.
어딘가 단정하지 못한 모습들이 내 눈에는 공산권 국가의 가난한 모습으로만 보인다.
정말이지 반공교육의 힘이란 무섭다.


사학과를 다니는 동생녀석에게 왜 동유럽 국가들은 다들 하나 같이 사회주의를 택하고 있었냐고,
이른바 ‘철의 장막’이라는게 왜 생겨 난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대답은 간단했다.









“가난했으니까.”




흠, 가난한 그들에게, 공동생산과 분배를 원칙으로 하며 부자의 돈을 떼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자는 모토의 사회주의는 매력적인 시스템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전에 또 다른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왜 가난했는데?”



“산업혁명을 안 해서 산업화가 늦었잖아.”



“왜 안 했는데? 하지.”



“형. 산업화가 왜 일어난건데?”



“몰라 자샤. 왜 일어났는데?”



“영국이랑 프랑스 이런데가 식민지 개척하면서 시장 수요가 늘어났잖아.
그래서 공장 짓고 기계 만든거잖아.
근데 동유럽은 식민지가 없어서 수요도 예전 그대로겠다 굳이 산업화 할 필요가 없었잖아.
그러니 서유럽애들 못 따라가서 가난한거지.”



“… 그럼 왜 식민지를 안 먹은건데? 걔네는 평화주의자였냐?”



“아 씨.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걔네는 주변에 큰 바다가 없잖아.
아프리카나 남미 같은데로 나갈 방법이 없었잖아.”




“아..”












정리 하자면,
바다로 진출 → 식민지 개척 → 시장 수요 증가 → 산업화 → 경제 성장
이라는 전형적인 서유럽의 발전 순서를 밟지 못해서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던 와중에 채택한게
칼 맑스 아저씨의 사회주의인데, 이게 결과론적으로 실패한 선택이 되어버린 것이다.




과거에는 공산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를 여행하려면,
여행사에서 주관하는 값 비싼 단체 패키지를 이용해야만 했었고
그나마 가 볼 수 있는 곳도 수도인 프라하의 일부 지역으로 한정되었었다고 한다.
(사족으로, 지금도 전 세계 배낭족들의 메카인 방콕의 카오산로드에 가면 같은 방식으로
평양투어 패키지도 있다고는 하는데,
당연한 말이겠지만 남한 국적을 가진 사람은 이 패키지를 이용할 수 없단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할 텐데.)
























그리고 90년대 이후 체코에 민주주의가 찾아 들면서 개방이 된 이후에야
보헤미아의 숨은 보석 같은 도시들이 배낭족들에 의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프라하를 가기에 앞서 방문한 이 체스키 크룸로프는, 그 중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이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그리고 개발에서 소외된 모습도 도시 곳곳에서 풍겨 온다.
인포메이션센터에서 짐을 맡기고 싶다니까 배낭에 옷핀으로 번호표를 붙여 주고는,
건물 뒤로 함께 돌아나가서 무거운 자물쇠로 잠긴 창고문을 연다.
잡동사니들 사이로 아무 곳에나 짐을 두면 된다고 말하는 직원의 폼이 친절하기는 하다.

























특별한 문화재가 있는 도시라기 보다는,
붉은 지붕들과 함께 강물이 S자로 굽이치는 전경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문화재다.
까 보면 애절한 사연이 있는 절벽 같은게 있음직도 한데, 이 곳 사람들이
아직까지 순박해서인지 도시의 분위기에 걸 맞는 이야깃거리를 제대로 포장해 내지 못하는 듯하다.
체코 명물 마리오네뜨 전시장을 가 봐도, 주인장은
지키는 사람 한명 없이 인형들로만 가득한 다락방으로 안내하더니,
불만 탁 켜 주고는 “재밌게 보세요”라는 말과 함께 내려 가 버린다.































잇속이 밝은 서유럽 사람들이라면 박물관을 꾸미고 기념품을 팔면서
뭔가 수입을 올릴 장치들을 잔뜩 꾸며놓았을 텐데.
내가 인형 한두개 슬쩍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좋은건지 나쁜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 사람들 참 장사 할 줄 모른다.









나도 이들 처럼, 가족과 함께 자동차와 자전거가 있는 여행도 한번 해 보고 싶다.
가족단위의 여행 보다는 다들 먹고 살기 바쁜게 또 우리네 세태인지라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나도 '혼자 다닐 때가 좋았지.'라고 툴툴거리면서 자동차 지붕에다
자전거를 묶고 있을 날이 올 것이다. 오게 만들겠다.
그러기 위해, 지금은 나의 길을 가자.















체코의 기찻길 창 밖 풍경은 그저 목가적이고 고요한, 진짜 시골의 풍경이다.
그 좋다 좋다던 스코틀랜드 하일랜드는 장엄하기는 했지만
워낙 신비로운 분위기라서 도저히 사람이 진짜로 살아가는 생활공간으로서의 매력은 느낄 수 없었다.
알프스자락의 스위스는 정 반대로 너무나 인위적이다.
요정들이 꾸며 놓고 간 듯한 동화 속 풍경은 물론 아주 예쁘지만,
그 곳 사람들이 거기에 호수를 만들고 꽃을 심고 집을 짓지 않았더라면,
스위스가 그런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체코의 사람들로 말하자면 확실히 뭔가를 꾸밀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기차에서 뛰어내려 아무 집에나 들어서면,
꾀죄죄한 셔츠 차림에 이가 듬성듬성 빠진 할아버지 할머니가 활짝 웃으면서
‘어서오너라’하고 반겨 줄 것만 같다.
그러면서 씨암탉도 즉석에서 한 마리 잡아 줄 것도 같다.
투박하지만 정감 있다.
위선이라고는 단 한톨도 찾을 수 없는 그런 형태의 풍경이다.



이런 자연 속에서 사는, 이런 사람들이 사는 나라를 여행하면서.
‘체코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공산국가였다던데,
공산당은 다 머리에 뿔이 났다는게 사실일까.
그런데서 사진 찍고 돌아다니다가 붙잡히면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는건 아닐까’
하는 걱정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할 필요도 없었던건데,
반공교육의 효과는 참으로 크다.



그래 빨갱이들 사는 모습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빨갱이 소굴 프라하로 떠난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09-04-06 14:11:58 불펜 게시판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