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츨라프 광장에서 내려다 보이는 광고판에는 자랑스런 LG, 삼성의 간판이 떡하니 걸려 있다.
거리에는 한국차가 예상외로 참 많다.
오스트리아의 바트이슐이라는 촌구석에서는 한국배낭족은 없는데,
어이 없게도 쌍용자동차 대리점이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갈 뻔한 적도 있다.



하지만 정작 해외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은 사실 외국 투자자들에게 주식이 분산되어 다국적기업화 되어가고 있고,
부끄럽게도 일본회사로 알려지는 것이 기업이미지에는 더 낫다고 판단해
한국기업임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지인들도 저 회사들이 한국에 기반을 둔 회사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낯익은 상호가 반갑다.
아침마다 운동장으로 불러 내서 국기에 대한 경례 시키고 애국가 부르게 하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못 따면 하늘이라도 무너진양 아쉬워하게 하던 민족주의 교육, 성공했다.










서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소득이 낮다 보니 체코는 물가도 싸다.
빠리에서 하나에 3유로씩 하던 바게뜨 샌드위치가,
체스키부다요비치역 구내 매점에서는 덤으로 500ml짜리 콜라까지 얹고도 1유로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다.
이런 곳에서는 돈을 아낄 필요가 크지 않다.
길에서 뭔가 맛있어 보이는게 있어도 이전처럼 사진만 찍으면서 입맛 다실게 아니라 돈을 주고 사 먹을 수 있다.



스페인도 좋고 이탈리아도 좋지만,
남은 일정을 다 접어버리고 그냥 동유럽을 떠돌아 다닐까 하는 위험한 생각을 해 본다.




이 바람직한 물가를 맞이 하여 우선, 밀린 빨래부터 해결 하기로 한다.
장기간의 여행에서는 빨래도 참 일거리다.
젖은 옷이야 침대 머리맡에 널어 놓으면 습도가 낮아서 하룻밤 사이에 다 마르기는 하는데,
그 전에 세면대에서 내가 하는 짓이 빨래가 맞는지 아니면 옷을 그냥 비눗물에 적셨다
대강 헹궈서 말리는건지 참 찝찝했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 외롭기는 하지만, 진드기나 이를 동행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호스텔에서 소개 받은 바츨라프 광장 바로 옆의 빨래방에다 배낭을 탈탈 털어 꺼낸
산더미 같은 빨랫거리를 맡겨버리고, 시가지 구경에 나선다.











사실 체코가 공산주의의 그늘 아래에서 웅크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가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며 새마을 운동에 여념이 없을 때,
체코, 그 당시의 체코슬로바키아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기치 아래
자유화 개혁프로그램 '프라하의 봄'에 착수했었다.
의회제도와 정당 정치의 도입, 사전검열제도 폐지, 죄형법정주의의 적용으로
국민의 지지를 한 껏 받은 민주주의가 뿌리 내릴 수 있을 뻔 했다.




그러나 시기는 동서가 날카롭게 대립하던 냉전시대였다.
공산주의의 '큰형님' 소련은 이념을 배반하는자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본보기로 삼기 위해
곧장 대규모 군대를 보내 프라하를 점령하고 지식인층을 숙청했다.
세상에서 가장 골치 아픈 소설 중의 하나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배경도
소련에게 점령당한 프라하였다.
잘나가는 의사였던 주인공이 건물 유리창닦이 신세로 전락해버린 장면이 기억난다.










배낭족에게는 볼거리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한 바츨라프 광장은 그런 소련군에게,
수십만의 프라하 시민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
새파란 청년이 분신자살까지 해 가면서 저항한 곳이다.




광장 중앙의 기마상은 10세기경의 보헤미아 왕국의 왕, 성 바츨라프 1세인데,
죽고 나서 성인으로 추대 되어, 보헤미아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동굴 속에서 잠자던 기사단을 이끌고 돌아와서 왕국을 구한다는 전설을 갖게 되었댄다.




그리고 그 성 바츨라프는, 체코가 원치도 않은 사회주의로 인해 고통 받고 있을 때,
천년의 잠에서 깨어나 정말로 돌아왔다.
40년 동안 군림해오던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비폭력 혁명을 이끌었고,
민주주의 국가로 다시 태어난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한 것이다.
전설을 현실로 만든 그 이름이 바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체코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이다.




물론 우연히 이름이 같은 것이었겠지만,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을
성 바츨라프와 헷갈려 하는 가이드북도 가끔 보이는데, (06-07판 백배 ㅅㅂㄻ!!)
당시에는 그 이름만으로도 국민들에게 지지율 10%는 먹고 들어가지 않았을까.
애를 낳으면 이름부터 잘 짓고 볼 일이다.
여담으로 바츨라프라는 이름이 영웅의 이름이듯,
호나우두라는 이름은 또한 축구를 잘 하는 이름이 아닐까 싶다.
농담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박찬호 박세리 박지성 박태환처럼, 스포츠 스타 중에서는 유독 박씨가 많다.











그리고 구시가 광장에는 사람도 많고, 유서 깊은 볼거리도 참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 구시청사의 오를로이 천문시계다.
2차대전때 시청사가 많이 파괴 되었지만, 시계탑만은 다행히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한다.
하도 독창적이고 아름다워서 다시는 이 같은 시계를 만들 수 없도록,
만든 이의 눈을 멀어버리게 했다는 전설, 앞을 볼 수 없게 된 장인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져 본 시계가
그 후로 400년 동안이나 바늘이 움직이지 않았다던 소설 같은 이야기를 가진 시계이다.


















두개의 원과 바늘이 계절과 날짜에 고대 보헤미아의 시간, 현재시간, 일출-일몰의 시간 등.. 많은 것들을 보여준단다.
매시 정각마다 닭이 울며 해골인형이 열어 젖힌 문에서 예수의 12사제가 나타나는 모습이 '장관'이라고 들었는데,
'심판의 시간이 오면 부와 허영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회개하라.'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매시 정각이 오면 구경꾼들의 기대와 설렘도 아무 소용이 없다. 오를로이는 회개 좀 해야겠다.
유럽 여행에서의 3대 사기라면서 브리셀의 오줌싸개 소년, 로마의 진실의 입, 덴마크의 인어공주 동상을 꼽는다던데,
이 참에 프라하 오를로이 천문시계의 정각 뻐꾸기도 포함시켜서 4대 사기로 만들었으면 싶다.
이럴거면 유명하지나 말던가.  다들 '나만 당할 수는 없다'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입소문을 낸 것일까.
있는 힘껏 요란하게 난리치던 에딘버러 왕립 박물관의 시계가 새삼 그리워진다.
그걸 먼저 보는게 아니었는데.  










얘야. 보고싶구나.












11시 정각이 되기만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던 이 사람들 다 어떡할겁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기백명을 낚아 올리고 있을테지.    












프라하에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삐쭉삐쭉 솟은 첨탑들도 참 많다.
유럽바닥에서 쌔고 쌘게 성당성당이라며, 들어 가 볼 생각 조차 하지 않은 주제에
건축양식이 어쩌니, 스테인드 글라스가 어쩌니 할 수는 없다.
다만 구시가 광장 정 중앙에 우뚝 선 반골정신의 아버지 얀후스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로마에 있던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쫓겨났다가 세 조각으로 찢어지면서  
카톨릭 세력이 힘을 잃어 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종교의 힘이 지금과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컸던 시기였다.
교황청은 오히려, 성베드로 대성당을 지으면서  
사그러져 가는 권위를 살리려는 몸부림을 한참 치고 있었다.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고, 성직자 자리를 매매하면서
부패 할대로 부패한  당시의 카톨릭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선 사람 중의 한명이 이 후스이다.  
교황의 말 한마디면 황제도 파문되던 마당에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있지
교황의 입 속에 있지 않다.  교황도 죄를 지으면 교황이 아니다.'라는 말로 '개겼'으니
신성모독에 반역에 죄씸죄다. 능히 이단으로 몰려 화형까지 당하고도 남을만한 일이었다.  
변질되어가는 교단에 경종을 울리려는 취지야 더 없이 좋았지만 수위 조절에는 실패했다.  




덕분에 종교개혁운동이 거세져서 30년 전쟁이 일어나고,  
100년 뒤에는 후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마틴루터와 칼뱅, 그 외 기타 등등 일당이
개신교를 만들기까지에 이른다.    







카톨릭의 부패를 참다 못해 생겨난 개신교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다른 종교들보다 훨씬 더 지혜롭지 못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으니
그것도 참 문제다.  




지도부는 교회 건물을 더 크게 지어 더 많은 교인들을 끌어 들이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고,
그렇게 모인 헌금이 사용되는 내역은 투명하지 못하다.  




미련한 방식으로 전도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다보니  
사회 통념에 한참 벗어난 선교도 왕왕 벌어진다.  
그 과정에서 뒤따를 수 밖에 없는 마찰들은 편리하게도
12사도들이 겪은 박해와 동일하다고 해석하여
예수님 제자들의 아우라를 그저 뒤집어 쓰려고만 하고 있다.  

<span "font-size: 10pt">무수히 많은 교인들이 적을 두고 있는 커다란 교회를 운영하자면 엉뚱한 유혹들로 부터 벗어날 수 없고,
아무리 훌륭한 사람들로만 이뤄진 단체라 하더라도 집단이기주의는 생겨 날 수 있다.</span>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과 일반인을 연결시켜주는 곳이니까,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런 청지기로서의 본분을 끝까지 지켜줬으면 좋겠다.
비기독교인들이 기대하는 종교인으로서의 윤리를 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세상이 아무리 흉흉해 지더라도 세상의 빛과 소금인 성직자들만은 더욱 더 선하게 사는 모습들을 보여 줬으면 좋겠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며 오만하게만 굴지 말고,  
같은 하늘 아래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신앙 없는 이들의 말에도 귀를 좀 기울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