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유럽대륙으로 건너 왔다.

대륙에서의 첫 도시는 바로 빠리다.

예술의 도시. 낭만의 도시. 연인의 도시.

호사가들이 유럽에서도 특히 온갖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 치장해대는

가장 매력적인 도시.



















스코틀랜드에서 비행기로 날아왔기 때문에 빠리에서 머무는 며칠 동안

유레일패스를 아껴둘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물론 있겠지만,

나름대로는 강력한 선빵이랍시고 만들어낸 일정이다.

선발투수는 강해야 한다. 빠리는 처음으로 가야만 한다.

왠지 원숭이와 땅콩개수를 소재로 한 사자성어가 생각나는 주장이지만,

영국 다음의 목적지가 빠리인 것은 이미 중학교 때부터 생각해 둔 일정이었다.

빠리가 마지막 경유지여야 한다는 ‘근의 공식’은 내게는 먹히지 않았다.

하여간 중요한 것은 내가 빠리에 왔다는 사실이다.















예상 밖으로 불편하고 구질구질한 모습으로 배낭족을 당황시키는게 이 빠리의 지하철인데,

그마저도 멍청하게 잘못 내려 꽁꼬르드광장에서부터 개선문까지

지하철로 장장 다섯정거장이나 되는 거리를 마냥 걷게 되어도 전혀 안타깝지가 않다.

그 거리가 다른데도 아니고 샹젤리제니깐.

어둑한 지하철간에서 오줌냄새를 참고 있는 것보다야 가벼운 마음으로 샹젤리제를 걷는 것이 훨씬 기분 좋은 일이다.

















개선문에 올라가서 바라보는 해질녘의 라데팡스야 말로

빠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정경이리라고 벌써 오래 전부터 생각했었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캬~





나는, 빠리에 와 있다.



















빠리에 온 첫날이고, 개선문에서 내려왔을 때 해가 다 졌다면 당연히 에펠탑으로 가야 한다.

유럽을 대표하는 것이 또 이 에펠탑의 야경이지만, 이런식의 달력 사진은 식상하다.

역시 오래 전부터 생각 해 온 대로, 에펠탑 깊숙한 곳으로 똥침을 넣어준다.

















이 지점에 서게 된다면 누구나 고개를 젖힐만한데,

왜 이런 구도로 찍은 사진을 그 동안 못 보았는지 모를 일이다.















여름 밤의 에펠탑 아래에는 사람들이 참 많다.

떠들썩한 노랑머리 친구들, 늘씬쭉쭉빵빵한 여인들,

청바지에 흰 운동화 차림의 한국사람들,

얼굴에 기름이 번들번들하고 배가 나온 중국인 아저씨들,

에펠탑 모양의 열쇠고리들을 절렁절렁 들고 다니며 파는 흑인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와 눈이 마주친,

40대쯤 되어보이는 나긋나긋하게 생긴 멋쟁이 신사 아저씨.









“그거 참 좋은 카메라군요!!”





“음.. 좋은 카메라 라기 보다는 그냥 큰 카메라예요.”





“하하.. 자퐁?”





“…꼬레.”





“아. 미안해요. 꼬레와 자퐁을 구분하는 것은 내게 아주 힘든 일이예요.”





“괜찮아요. 사실은 저도 구분하기 힘들어요.”



"하하하.. 재미 있는 사람이군요."







프랑스사람 치고는 영어를 참 잘하는 아저씨다.

‘혼자 여행중인거냐.. 대단하다.. 그 동안 어디를 다녔었냐..

빠리에 온지는 얼마나 되었냐.. 빠리가 마음에 드냐.. 숙소는 어떻게 잡았냐..’

라고 운을 떼더니, 드디어 그 놀라운 이빨을 드러낸다.









“그런 싸구려 숙소에서 여러명이 한 방에서 생활하려면 불편하지 않아?

내 집이 바로 요 근처인데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우리집에 가서 샤워도 하고 쉬다 가지 않겠어?

내 생각에, 내가 너의 타입이 될 수 있을 거 같아.”

















이건 말도 안 된다. 나는 남자고, 저 아저씨는 내 취향이 아니다.

아저씨가 내 취향이냐 아니냐를 논하기 전에 나는 일단 남자랑은 손도 잡기 싫다. 당연하다.

하물며 20년이 훨씬 넘도록 아껴온 소중한 내 총각을 생면부지의 외국 남자에게 갖다 바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혹스러운 나머지 입에서는 영어도 잘 나오지 않는다.

‘미안하다. 이미 숙박료를 다 지불했고 짐도 다 거기 있다.

미안하다. 나는 이만 돌아가고 싶다.’라고 대충 주워섬기면서 도망쳐버린다.















인과응보다. 이 위대하신 빠리는, 건방지게도 자신을 상징하는 건축물의

부끄러운 곳을 노린 내게, 반대로 내 부끄러운 곳을 노리는 빠리지앵을 보내어

응징을 해온 것이다. 쳇…







숙소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지하철을 탔는지 아니면 그냥 뛰어왔는지.

확실한건 그냥 걷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4인실 방에 딸린 화장실에서는 누군가가 샤워를 하고 있다.

응당 녀석이 나오기를 기다려서 인사하고, 말 섞다가,

할말이 다 떨어지면 내가 샤워를 하러 들어가야 할 상황이지만 그저 혼자 있고 싶다.









세면대에서 대충 얼굴이랑 발만 씻어내고,

벽을 향해 돌아누워 시트를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 쓴다.

트라우마 한번 제대로 입었다. 사람 대하기가 두렵다.

지금 샤워하고 있는 저 놈이 나오더라도 절대 아는 척 하지 않을 테다..









서럽다. 엄마가 보고 싶다.

대륙.. 이런 식으로 신고식 치뤄 주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