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착륙하는 동안, 가만히 그간 혼자서 싸돌아 다닌 나라들을 하나하나 헤아려 본다.

 유럽, 동남아, 중국, 홍콩, 인도.. 줄 잡아 20개쯤?

그 사이에 써 지른 돈이 얼마나 되는지는 감히 계산 해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부모 잘 만난 덕에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려 왔다. 인정 한다.

굳이 변명을 해 보자면, 그래도 내 여행, 본전은 뽑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몇 차례의 여행 동안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워왔다고 자부한다.

하다못해 로마의 소매치기나 인도의 거지도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희한한 진리 한두개씩은 꼭 가르쳐 주더라.

성공적인 돈지랄이었다.

20대가 다 가기 전에 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할 것만 같았고 보다 많은 일들을 경험 해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긴 여행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어디가 좋을까. 어디에서 무슨 꼴을 겪어야 더 강해질 수 있을까. 더 지혜로워 질 수 있을까.

그 동안 많은 배낭족들을 만났고 그 들로 부터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다.

여행자가 가장 가기 힘든 곳. 대중교통이나 여행정보나 치안 같은 사람 살 여건이 가장 열악하다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영어 하나는 잘도 통하는 곳이 있었다.

그래서 선택했다. 모든 배낭족들의 종착점.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존재하는 자원의 보고.

 아프리카.

아주 그냥 공항에서 파는 기념품 스케일 부터가 다르다.

요하네스버그에서 나이로비행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검색대를 지나다 보니 경보기가 뚜뚜하고 울린다.

내게는 낯설지 않은 일이다. 카고 바지에 요란스럽게 주렁주렁 달린 무쇠 단추 때문이려니.

금속 탐지봉을 손에 든 공항 안전요원은 익숙한 동작으로 내 몸을 검사하기 시작했고, 나는 익숙한 농담을 던진다.

"There's no bullet, no gun, no bomb, no missile, no nuclear. Please just let me go."

‘총도 없고 총알도 없고 폭탄, 미사일, 핵폭탄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보내주쇼’

이 얼마나 평온한 제안이며 따뜻한 응대인가.

조지 부시와 빈 라덴, 혹은 그 최측근들 중 어느 한 명이라도 나 같은 인간이 있었다면,

세상은 화합과 질서로 가득 할 수 있었을 테고 사람들이 비행기 타고 내리는 시간도 훨씬 줄어 들 수 있었을 텐데.

그 동안 이 단촐한 영어 한 두마디면 누구든 피식 웃으며 그냥 가라고 손짓 해 주곤 했었다.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키가 크고 비쩍 마른 흑인 직원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다.

검은 얼굴 한 가운데 박힌 새하얀 두 흰자위가 내 얼굴을 쏘아보고 있다.

아차, 여기 아프리카였지.

정국은 언제나 일촉즉발 내전 위기이고 국민이 가난하여 세금이 부족하니 경찰도 적어 치안은 헬이라지.

세계 어디에나 마찬가지이듯 여기서도 개판치고 다녀간 못난 중국인들이 많았을테고

이 검둥이놈은 내가 중국인인줄 알텐데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끌려가게 되면 홀딱 벗겨져서 보복성 몸수색을 당하게 되는걸까.

이 자식들, 그 와중에 내 카메라며 MP3 플레이어, 현금, 이런 것들 한 두 개씩 슬쩍 주워가려 들겠지.

어떡해야 할까. 어금니 꽉 깨물고 배실배실 웃으면서 농담이라고 넘겨 볼까. 그런다고 넘어가 줄까.

화를 버럭 내 볼까. 아니야 그러다가 더 큰일 날라.

 그냥 아무 말 하지 않은 척 잠자코 있을까.

제길 그깟 비행기 좀 타 본게 무슨 벼슬이라고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농을 걸었을까.

왜 나는 이 먼 곳까지 와서 맞을 짓을 하고 다니는걸까.

쇠창살에 갇힌 채 흑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제발 보내 달라고 훌쩍훌쩍 울고 있을 내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릴 무렵,

흑인 공항 직원은 그제서야 나를 향해 씨익 웃으면서 유난히 흰 이를 드러낸다.

아프리카 특유의 어설픈 억양의 영어가 들려온다.

"이츠 오케이 이프 유 헤브 잇."

뭐? OK? 뭐라고? 그런거 갖고 있어도 괜찮다고? 그럼 가도 되는건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이 녀석이 딴 마음 먹기 전에 후딱 검색대 저 편으로 내빼 버린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딱딱 맞아 떨어지게 되니 치밀한 준비가 필요한 여행지가 유럽이랬다.

계획대로 불가능 한 것도 없고, 계획대로 가능한 것도 없다는 곳이 인도랬나?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에서는 계획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계획이라는 단어를 쓸 일도 없댄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 아프리카구나. 어째 비행기 좀 오래 탔다 했다. 나 아프리카 왔구나.

고백하건대 1년 오픈 왕복항공권 한 장 말고는 딱히 정해 둔 일정이라는게 없다.

여기는 계획이 허락되지 않은 곳. 시간이 존중 받지 못하는 곳이니까.

앞으로 어디를 가서 무슨 꼴을 겪을 지 아무 것도 모른다.

그래 봐야 죽기 밖에 더 하겠어?

사자한테 물려 죽으나 쥐새끼 때문에 복장 터져 죽으나 죽는 건 매 한가지.

여지껏 살아오며 컨닝 보다 나쁜 짓은 한 적이 없다. 지옥 갈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선배거긴안돼의 2009-2010 삐딱한 아프리카. 시작.

영계엉아 연재란 만들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