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푸른빛과 싸우다 : 롯데 자이언츠 단장의 금송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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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단장의 금송아지
“이거 뭐지? 내가 어떻게 된 거야?”
라고, 입 밖에 소리 내어 누군가에게 말한 건 아니다. 나한테는, 그 누군가라는 게 없으니 말이다. 여하튼, 그런 생각을 한 거다. 그 발견의 순간, 나는 자기 점검의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필요한 건 뭘까? 필기감이 좋은 펜? 타이프라이터? 워드프로세서? 인터넷이 연결된 퍼스널 컴퓨터? 아니, 아니... 야동이다. 야구동영상이 아니라, 야한동영상이다. 흠, 평소의 나는 야한동영상보다는 야구동영상을 훨씬 더 좋아한다. 웹하드 사이트 마일리지가 얼마나 남았더라? 아니, 집에 있는 피씨 하드에 뭔가 있을 것이다. 최소한 1년은 잠들어 있었겠지. 역시 일제보단 국산이 좋겠지.
그 여자...는 이뻤다. 아니, 정정하자. 예쁘다고 하기엔 죄송할 정도로 어감이 들어맞지 않으니, 아름다웠다? 멋졌다? 멋졌다. 그래, 내가 낙향해서 보름동안 나다니며 본 그 어떤 여자... 여성보다 멋졌다. 시립도서관 휴게실에서 본 그니는 멋졌다. 최소 일백칠십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시원한 키,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은 어깨,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목구비, 가늘고 긴 목, 무엇보다, 정장이 너무나 멋지게 잘 어울린다. 아무렴, 정장이 멋지게 어울리는 사람은 정말로 멋진 거다. 그 생각을 하니 나는 좀 의기소침해진다. 그 여자가 얼마나 멋졌냐 하면, 맞은편 테이블의 그 여자를 보고 당황해서 나는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책장에 커피를 흘리기도 하였던 것이다. 결국 나는 뭔가 머리 속을 좀 정리해보기 위해 자리를 정리하고 가방과 커피잔을 들고 나가 도서관 뒤뜰 벤치에 앉았다.
디스 플러스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후 들이마셨다가 뱉으니, 뭔가가, 그 뭔가가 생각났는데, 아아, 그 멋진 여자는 최소한 나보다 열 살은 더 들어 보였다. 피부가 아무리 깨끗하다 한들, 사십대는 사십대로 보이는 것이다. 사십대 초반도 아니고 중반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그러니 감히 ‘예쁘다’고 할 수 있으리?) 그리고, 간혹 이십대로 보이기도 한다는 나의 얼굴을 생각해 보면, 그쪽에서 보면 나는 최소 열서너살 아래로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의 복장은 거의 긴팔 언더셔츠에 헐렁한 반팔 티셔츠를 덧입은 힙합꼬맹이 스타일이니... 앞으론 좀 나이에 걸맞는 복장으로 다녀야 할까, 나도 슈트가 멋지게 어울리는 남자이고 싶긴 한데, 일단 지금은 제대로 된 슈트 한 벌조차 없다는 문제가 있다. 일단, 슈트는 당장에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하느냐,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아니 사실은, 애초에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를 썼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고 나온 결론에 의해, 나는 시를 썼다. 어떻게 하느냐, 무엇을 하느냐를 생각해보니 나의 답은 겨우 그 정도였다. 뭐, 어쩌겠는가?
잡념의 기교
어떤 오후에는
햇빛의 입자가 창문턱에서
불규칙 바운드로 튀어들어와
물그릇에 담긴 야생화 자락을 건드리고
꽃은, 마음도 없는 주제에
하늘거리다가
사르락
그 소리 뿐인
느린 순간에
테이블 너머 찻잔 너머
어느 조용한 손목을
사르락
이 손끝이 건드린다면
사라락
이 마음의 불규칙 바운드
건너뛰고픈 웅덩이가
어디 찻잔과 테이블 뿐일까
덥석이라고 해보려다가
슬그머니라고
말도 못해보는 오후
01＃ 67#9 26#7
‘시’를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전화 주세요. 문자메시지라도, 메일도 좋습니다. 연락 주시기를.
쓰고 보니 참... 그 누구도 아니고 나다웠다. 말도 못해본다니, 그 소심함이란! 찻집에서 차 한잔 하면서 손목 덥석? 아니, 슬그머니 그것도 못해본다는 건데, 그게 참, 직접 말로 뭐라고 해볼 생각을 안하고, 못하고 결국 뭐 구시렁구시렁 써서 연락처 적은 종이 한 장 건넬 생각을 하는 그런 나, 나다운 글이 아니고 뭐겠는가. 어쨌든, 뭔가 쓰고 읽고 하는 사람, 혹은 딱 그것밖에 못하는 사람, 그게 나인 것이다. 그리고 목소리 하나는 자신이 있었으니, 많은 사람들, 특히 많은 여성들이 멋지다고 인정한 내 목소리 아닌가. 대학생 시절 교내 음악방송 디스크자키를 하는 동안 목소리 듣고 방송국에 찾아온 여학우들이 실물을 보고 그냥 발길을 돌렸다는 일화도 있는 것이다. 아참, 저 소심한 시는 어디서 베껴 적은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쓴 것이니, 그 어느 시집에서도 찾으실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결코 시인이 아니다.
평소 안면이 좀 있는 도서관 사서 아가씨에게서 A4용지 한 장을 얻어서 저런 시를 꾹꾹 눌러 쓰고, 그런 메시지를 적은 후, 고이 접어서 나희덕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의 68페이지와 69페이지 사이에 끼워두고, 다시 책장을 펼칠 준비를 하고 그 여자를 찾아 도서관 이곳저곳을 슬슬 기웃거리다가 정기간행물 자료실에서 그 슈트를, ‘슈터블’한 모습을 다시 발견했다.
영화 잡지를 보는 그의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월간 <객석>을 뒤적이면서, 준비한 ‘편지’를 전할 타이밍을 노리는 거다. 그런데 그 타이밍 잡기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뭐라고 하면서 종이를 내민단 말인가? 그냥 쓰윽 내밀고 스윽 물러나서 사라진다? 그건 정말 이상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테이블 끝에서 책을 보던 학생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니, 그니는 자리를 살짝 옆으로 두칸 이동해서 내 정면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자리를 잡는다. 뭔가 느끼는 것이 있는 건가? 아니, 사실은 별다르다 할 것 없이, 그저 일상적인 것으로, ‘거리’를 두는 것뿐임을, 나도 안다. 안다 한들 어쩌는가? 그와는 별개로, 조바심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사진이 나를 보고 해맑게 웃고 있다. 나도 해맑게 웃고 싶었지만, 긴장한 탓인지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화장실에서 할 일을 하면서, 도서관 화장실 창문으로 별로 청명하지는 않은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짧은 시간 동안 긴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 같다. 꽤 멀리 갔다 싶은 것이, 나는 재작년 가을 누군가와 같이 갔던 거제도 바닷가의 어느 모텔까지 떠올려 본 것이다. 꽤 괜찮은 가을날 가을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무튼, 정말, 멀리 갔다. 나란 놈이 참, 이렇다. 아마, 화장실 탓이 아닌가 싶다. 남자가 화장실에서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탓일지도 모른다.
화장실에서 할 일을 마치고, 물론 손도 흐르는 물에 씻으며 결국 결정한 것이, 뭔가 말해야만 한다는 그 생각, 딱 그 정도였으니. 멀리 갔다 온 것 치고는 참 한심할 정도의 소심한 진전이 아닌가. 딱 그 정도의 진전을 이루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보니, 코트를 팔에 걸치고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는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눈치 못 채도록 조심하면서 - 물론 실제로 뭔가 눈치를 챘는지 아닌지 와는 별개의 일이지만 - 그니가 다시 휴게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는 것만을 확인하고 건물 밖으로 나와서 디스 플러스에 불을 붙였다. 그래, 기다리자. 학교 마친 중학생 애들도 이제 보이고 있는 시간, 폐관 시간도 얼마 안 남았으니 입구에서 기다려 보자.
그래서 나는 기다리는 동안 나희덕 시인의 시집 한권을 다 읽었다. 자판기 커피도 한잔 했다. 나희덕 시인은 참 멋지게 생겼다. 그런데, 지금은 시집의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커피 탓은 아니다. 종이컵을 구겨 던져버릴까 하다가 분리수거 통에 고이 집어넣고, 뻐근한 무릎을 한번 흔들고는, 다시 건물로 들어가서 휴게실로 가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를 닮은 딸의 목소리, 딸을 닮은 엄마의 목소리. 아, 가늘고, 날카롭다. 두 목소리 모두. 안타깝게도, 상쾌한 정도에서 머무를 수 있었는데, 좀 더 나아가버린, 그래서 날카로워버린 두 목소리가... 보였다. 도서관 휴게실 테이블에 모녀가 정다운 표정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멋지게 슈트를 차려입은 엄마와, 엄마를 닮아 키가 큰 여중생 하나. 교복이 참 예쁘다. 예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아, 아깝게도, 내 수비 범위 바깥인 이 목소리들. 아슬아슬하게, 아웃인 목소리들. 이건 사실 나중에 생각한 것이다. 어쩌면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여하튼, 나는 모녀를 문 너머로 보고, 모녀의 목소리들을 문 너머로 듣고는 다시 발길을 돌려 건물 밖으로 나왔다. 디스 플러스엔 다시 불이 붙었다. 그게 디스 플러스의 운명이다. 디스 플러스가 타오르는 동안, 나는 진즉에 ‘편지’를 전하지 못한 것을 좀 후회했다. 뭔가 해보기라도 했어야지? 혹시 내일 또 기회가 있을까? '편지‘는 혹시 나중에 다른 경우에라도 다시 활용 가능하지 않을까?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서, 수도 검침원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서, 옥상의 빨래를 걷어야 한다. 집에 가면, 밥도 해야 한다. 하지만, 뉘엿뉘엿, 일몰은 진행되고 있었다. 버스 창밖으로, 소도시 항구의 아름다운 일몰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이어폰을 통해 휴대용 CD플레이어로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들으며, 나는 깨달았다.
“이게 뭐지? 내가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어떻게 된 걸까. 그래, 내 가장 최근의, 그러니까 2년 전쯤의 연애 상대가 나보다 두 살 많은, 그것도 ‘유부녀’였던 건 사실이지만, 하지만, 그땐 나이는 비슷했다. 나는 어떻게 된 걸까. 정말로 중년의 학부형을 보고 혹해서 시까지 쓰다니. (게다가, 대한민국의 21세기는 어설프게 쓴 시로 누군가를 홀릴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이래도 괜찮은 거냐? 그냥, 그녀는 너무 멋졌다. 이걸로 마무리할 수 있는 걸까? 그래도 되는 걸까? 당혹스러웠다. 낙향한 이후 보름 동안 이 소도시에서 20대 30대 여인을 꽤 많이 본 것 같은데, 시를 쓴 적은 없잖아? 슈트가 멋지게 어울리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구나. 그런 거겠지. 그렇지, 그녀는 너무 멋졌다. (예쁘다고 할 순 없었지) 하지만, 결국 나는, 나 자신을 점검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의 성적인 취향을 말이다. 야동, 야구동영상과 야한동영상. 야한동영상을 보는 건 사실 별로 멋진 일은 아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다, 신장개업한 전자제품 대리점에 화가 났다. 이동전화 판매점에 대해 화가 났다. 시끄럽다. 아, 시끄러워서 그렇다. 이 천박하고 불쾌한 소음들이라니. 내가 나쁜 게 아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다. 단지 나는 멋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로저 젤라즈니 풍의, 초인이 주인공인 소설을 하나 써보기로 마음먹는다. 멋진 슈트도 굳이 필요 없는 초인. 슈트가 없어도 멋진 초인. 파괴적이지만, 바이얼린 소리를 좋아하는 그런 초인. 야동도 필요 없는.
집에 돌아와 티비를 켜니, 가을에 야구하는 프로야구 팀들이 있다. 이거 놀라운 걸, 가을에도 야구를 하다니? 놀랍게도,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다. 나는 라면을 먹으며 야구중계를 보느라, 야동도, 멋진 초인도, 멋진 슈트도 다 잊었다. 아무렴, 포스트시즌만 아니었어도, 나는 멋진 에스에프 소설을 하나 썼을 것이고, 그걸로 멋진 슈트도 장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 병살타! 저런, 병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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